고대사

윌리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 Bf 109를 설계한 독일의 전설적 항공 공학자

윌리 메서슈미트는 누구인가?

빌헬름 에밀 메서슈미트(1898년 6월 26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 1978년 9월 15일 뮌헨)는 독일의 항공 공학자입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주력 전투기였던 메서슈미트 Bf 109를 설계한 인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메서슈미트는 1898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항공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1913년부터 활공기 전문가인 프리드리히 하르트(Friedrich Harth)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하르트가 군에 징집되면서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S5 활공기를 메서슈미트는 혼자 힘으로 작업했습니다. 1917년에는 스스로 군에 입대했지만 이후 다시 새로운 기체 개발에 복귀했습니다. 그는 뮌헨 공과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하며 하르트와의 협업도 계속 이어갔습니다.

첫 독립 설계와 창업

1921년, 그의 S9 활공기가 첫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메서슈미트가 처음으로 단독 설계한 항공기였습니다. 이후 S9를 시작으로 여러 프로토타입이 제작되었지만 기술적인 난관도 함께 겪었습니다.

1923년 뮌헨 공과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5년 M17로 첫 비행을 시도했다가 추락하는 사고를 겪어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1926년 3월, 메서슈미트는 바이에른 주 정부의 일부 재정 지원을 받아 밤베르크(Bamberg)에서 '플루크차우바우 메서슈미트 GmbH'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전금속 상용 항공기인 M18 개발에 매진했습니다.

BFW와의 합병

1927년 9월, 바이에른 당국은 메서슈미트에게 기존 회사인 바이에리셰 플루크차우크베르케(BFW)와의 합병을 설득했습니다. 메서슈미트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위치한 이 회사에 수석 설계자(설계국장)로 입사하게 됩니다.

M20 사고와 파산 위기

당시 루프트한자는 M20형 항공기 10대를 구매했지만, 그중 2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추가 구매를 취소했습니다. M형 항공기의 잦은 문제 때문에 다른 구매자들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BFW는 적자에 허덕이다 1931년 결국 파산했습니다. 메서슈미트는 독립적으로 활동을 이어갔고, 1933년 BFW가 재설립되자 1934년부터 새로운 상용 항공기인 메서슈미트 Bf 108 타이푼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Bf 109의 탄생

Bf 108이 특히 신생 독일 공군 장교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자, 바이에른 팀은 1934년 초 발표된 신형 전투기 경쟁에 응하기로 결심합니다. 요구 조건은 7.92mm 기관총 2정을 장착한 고속 단엽기였으며, 융커스와 다임러-벤츠가 개발 중인 신형 엔진을 탑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1935년,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BFW는 마침내 경쟁 참여를 허가받았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Bf 109A였으며, 프로토타입인 Bf 109 V1(V는 Versuchsflugzeug, 즉 실험기를 뜻함)은 1935년 9월 첫 비행에 성공해 레힐린의 공군 시험 센터로 보내졌습니다.

시험 비행과 채택

처음에 시험 비행사들은 Bf 109에 큰 호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좁고 취약한 랜딩 기어, 지상 주행 시 심하게 기울어지는 자세로 인한 위험성, 무거운 날개 면적 하중, 그리고 완전히 폐쇄된 매우 좁은 조종석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진행될수록 파일럿들의 생각은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공중에서 이 기체는 놀랍도록 빠르고 민첩함을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아라도(Arado)와 포케불프(Focke-Wulf)는 경쟁에서 물러났고, Bf 109와 하인켈 He 112만이 경쟁을 이어갔습니다. Bf 109가 명백히 우월한 것으로 평가되자 독일 항공부(RLM)는 각 기종별로 10대씩의 예비 생산분을 발주했습니다. 또한 전투폭격기 변형인 Bf 110도 탄생했지만 항속 거리 부족으로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겼습니다.

에르하르트 밀히와의 갈등

한편 메서슈미트는 전직 도이체 루프트한사 총괄이었던 에르하르트 밀히와 오랜 갈등을 빚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쥔 독일 항공부(RLM) 장관이 된 밀히는 M20 추락 사고 중 하나에서 친구를 잃은 것을 잊지 못했고, 메서슈미트에게 정부 발주를 맡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밀히는 1931년 BFW의 강제 파산에도 관여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서슈미트에게도 강력한 배후가 있었습니다. 그는 루돌프 헤스와, 헤르만 괴링의 절친이었던 테오 크로네이스(Theo Croneiss)와 인연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밀히의 권력은 제1차 세계대전 에이스 에른스트 우데트(Ernst Udet)에게 밀려나게 되었고, Bf 109는 독일 공군에 채택되어 세계 최고의 전투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Bf 109는 영국의 스피트파이어, 이후 미국의 P-51 머스탱의 우위에 대응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개량되었습니다.

Me 262: 세계 최초의 실전 제트 전투기

메서슈미트는 전쟁 초기부터 제트기인 Me 262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엔진 개발의 더딘 진행으로 프로그램은 지연되었습니다. 이 기체는 1941년 4월부터 피스톤 엔진으로 시험 비행을 했지만, 제트 엔진을 장착한 비행은 1942년 7월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최초의 실험 부대는 1944년 6월 30일에야 편성되었고, 최초의 실전 부대는 같은 해 9월에 가서야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지연으로 인해 메서슈미트의 제트기는 전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Me 210의 실패

병행하여 메서슈미트는 슈카(Stuka)를 대체할 기체인 Me 210을 설계했습니다(Me 110을 기반으로 1934년부터 개발). 그러나 이 기체는 완전한 실패작이었습니다. 프로토타입들은 결함 투성이였고 잦은 추락 사고를 빚었습니다. 영국의 드 하빌랜드 모스키토(De Havilland Mosquito)에 대항할 기체를 내놓지 못한 이 사건은 메서슈미트의 명성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추시켰습니다.

거대 수송기와 야심찬 프로젝트들

메서슈미트는 130명 이상을 수송할 수 있는 초대형 수송기 Me 321의 원천 설계자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은 그에게 폭넓은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미국 본토 폭격을 노린 Me 264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패전으로 이 기체는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로켓 추진 방식의 혁명적인 요격기 Me 163 코멧 역시 Me 264와 마찬가지로 무산되었습니다.

전후: 재판과 새로운 시작

전쟁 후 메서슈미트는 자신의 회사에서 강제 노동자와 포로를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회사는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 메서슈미트-베르케(Messerschmitt-Werke)가 되었고, 1966년 플루크차우크-유니온-쥐트(Flugzeug-Union-Süd, 이전에 융커스와 하인켈 공장들을 흡수한 회사)와 합병한 뒤 1969년 MBB가 되었습니다.

메서슈미트는 2년간 수감되었고, 출옥 후에는 독일이 항공기 제조를 금지당한 상황(활공기 제외)에 따라 KR 175 2인승 차량 등 비항공 분야 제품에 뛰어들었습니다. 독일의 항공 산업은 1956년 재무장과 함께 노라틀라스(Noratlas) 라이선스 생산이 이루어지면서야 본격적으로 재개되었습니다.

스페인과 수직이착륙기

이후 그는 스페인에서 푸가 마지스터(Fouga Magister)의 경쟁 모델인 히스파노 아비아시온 HA-200과 HA-300 제트기를 설계하는 등 여러 항공기 모델의 탄생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루트비히 뵐코프(Ludwig Bölkow), 하인켈과 함께 엔트비클룽스링 쥐트(Entwicklungsring Süd, 역시 MBB에 흡수됨) 내에서 수직이착륙기 VJ 101 C를 개발했습니다.

말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메서슈미트 재단, Messerschmitt-Stiftung)을 설립했습니다. 1970년 은퇴한 메서슈미트는 197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