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 혁명의 시작
러시아 혁명은 1905년 1월 22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날 가폰 신부(게오르기 가폰)가 이끄는 약 10만 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성상을 들고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 거처인 겨울 궁전을 향해 행진했습니다. 이 시위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군중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고, 침묵 속에서 항의를 표명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차르의 퇴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자로 여기던 절대 권력자에게 고통과 빈곤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차르의 군대는 이를 다르게 받아들였고, 평화로운 시위대에게 발포했습니다. 한 경찰관은 "당신들 지금 무슨 짓을 하는가! 종교 행렬에 총을 쏘고 있어, 차르의 초상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거야!"라고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폰 신부의 경호원들은 살해되었지만, 그本人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그보다 앞서 러시아 노동자들의 청원서를 작성해 많은 이들의 서명을 받아 두었는데, 청원에는 차르에게 정의와 보호를 요청하는 내용과 함께 정당한 임금, 교회와 국가의 분리, 노조 결성의 권리 등 체제가 한 번도 실시한 적 없는 개혁 요구가 담겨 있었습니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노동자들은 폭력 없이 이 청원서를 차르에게 전달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가폰의 지시에 따라 행진은 차르를 타도해야 할 적으로 여기던 볼셰비키에게조차 무저항으로 진행되었고, 군중은 찬송가 주여, 차르를 보호하소서를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2월 혁명: 차르 체제의 붕괴
1917년 2월 혁명은 페트로그라드의 대형 무기 공장이 수천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시민들의 물자 부족에 더해, 전선으로 파견될 병사들을 위한 징발까지 겹치면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2월 23일, 좌파 의원들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에서 군중은 빵을 요구했습니다. 이번에는 "차르 타도!"와 "전제정치 타도!"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시위대는 다음 날에도 거리로 나가 전쟁과 체제 모두에 대한 반대를 더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2월 25일, 니콜라이 2세는 계속 불어나는 행진을 진압하기 위해 근위대에 발포를 명령했습니다. 병사들은 명령에 따랐지만, 그날 밤 사람들의 편에 서서 무기를 돌렸고, 이튿날 아침인 27일에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하나로 화합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겨울 궁전을 점거했고, 의회 의원들은 입헌 정부 수립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르는 결국 민주적 양보를 약속해야 했으며, 전제정은 무너지고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봉기 세력은 노동자, 농민, 병사로 구성된 '소비에트'를 만들었고, 이렇게 이중 권력 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1917년 3월 15일 퇴위했으며, 1918년 7월 17일 처형되었습니다.
10월 혁명: 볼셰비키의 집권
1917년 10월,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레닌이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트로츠키와 함께 싸우면서, 임시 정부는 볼셰비키에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레닌이 주도하고 트로츠키가 조직한 10월 혁명은 피의 일요일과 2월 혁명 이후 가장 효과적인 봉기로 평가됩니다. 이는 기존 산업 질서에 맞선 혁명으로, 군주제를 타도하고 러시아 인민을 '그들의 존엄과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1917년 9월 13일, 트로츠키가 주석을 맡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레닌의 지휘 아래 결집했습니다. 레닌의 최우선 목표는 즉각적인 평화, 즉 3년째 이어져 온 전쟁의 종식이었습니다. 한 달 뒤인 10월 16일, 트로츠키는 혁명군사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위원회는 이미 2월 혁명 당시 봉기 세력과 화합했던 페트로그라드 주둔 병사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마침내 1917년 10월 25일(그레고리력 11월 7일), 혁명군사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했고 볼셰비키는 겨울 궁전을 점령했습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권력을 주장하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에서 탈퇴했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의미
"러시아 혁명은 추위 때문에 늦게 도착한 프랑스 혁명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실제로 볼셰비키가 차르를 폐위시키고 절대 군주제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 것은, 프랑스 국민이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보낸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었고, 종교는 더 이상 권력을 남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귀족들 또한 이후 조국을 떠나야 했으며, 이제 레닌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비로소 인민의 목소리가 표출될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