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사: 기원에서 현대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는 특정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제도이자 기관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회로, 신자 수는 10억 명을 넘습니다.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며, 전 세계 가톨릭 주교단(성직자, 주교, 추기경)을 이끕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서방 가톨릭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이 교회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며, 자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 중 하나로서 서구 문명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교회의 설립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사도 베드로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전(Papal Basilica of St. Peter)'이라고도 불립니다. 가톨릭 신앙에서는 천국의 열쇠가 베드로에게 전해졌다고 믿습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은 세계 최초의 교회로 여겨지며, 이 교회의 주교들은 사도들의 계승자입니다. 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보편적 수위권을 가집니다.

교회 건물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초기 교회 건물은 매우 소박했을 것입니다. 기록은 없지만 베드로 사도 사후 그는 같은 교회에 묻혔습니다.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새로운 교회를 지을 때 베드로의 무덤은 보존되었습니다. 현재 대성전의 건축은 1506년에 시작되어 1626년 거대한 건물과 주변 구조물이 완공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무덤은 여전히 같은 장소, 같은 교회 안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

교회는 성령,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로써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오류 없이 정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성체성사(유카리스트)

가톨릭 예배의 중심인 '성체성사(Eucharist)'에 따라, 교회는 '빵과 포도주가 초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습니다(화체설).

성모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공경

이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공경합니다. 가톨릭의 마리아 교리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심(무염시태), 평생 동정, 생애를 마친 후 천상에 불러올림 받으심(성모 승천)이 포함됩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의 의미

'가톨릭'은 그리스어 '카톨리코스(Catholicos)'에서 유래했으며 '보편적인(universal)'을 뜻합니다. 이 용어는 2세기 초 교회를 지칭하는 데 처음 쓰였습니다.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후 로마 교황과 일치를 유지한 교회를 '가톨릭'이라 부르게 되었고,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들은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또는 '그리스 정교회'로 불렸습니다.

이 분열 이후 서방 그리스도교의 주교는 '교황(Pope)', 동방의 주교는 '총대주교(Patriarch)'라 칭했습니다. 분열 직후 교황과 총대주교는 서로를 파문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로마 교황과 일치하는 교회들은 개신교와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톨릭'이라 칭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라는 명칭은 가톨릭 교회 문헌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6개 문서에 서명한 바오로 6세 때 공식화되었습니다. 교회는 때로 교황 및 주교회의 문서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로 명명되며, 비오 10세 교황은 교회를 '로마' 교회라 불렀습니다.

초기 기독교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입니다. 가톨릭은 교회가 1세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사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함(오순절)으로 공적 사명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예수의 선교사들은 지중해 연안 유대인 공동체에서 개종자들을 얻었습니다. 타르수스의 바오로 같은 사도들은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기독교는 유대교 전통에서 분리되어 독자적 종교로 자리 잡았습니다.

로마 주교의 수위권 확립

초기 교회 조직은 느슨했고 '복음 전파'에 집중했기에 다양한 기독교 해석이 공존했습니다. 가르침의 통일을 위해 2세기 초 교회는 성직 계급 체계를 정비했습니다. 각 도시의 중심 '주교'에게 그 지역 성직자에 대한 수위권을 부여했습니다.

동시에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에 맞춘 관구 제도가 생겼습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의 주교들은 인근 도시 주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당시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로마 교회가 최고 위상을 가졌습니다.

보편 공의회

교회 교리는 정기적인 보편 공의회에서 정의되었습니다. 2세기 주교들은 지역 회의를 열어 신앙과 정책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교리는 이후 '교부(Church Fathers)'라 불리는 신학자들과 교사들에 의해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보편 공의회는 신앙 논쟁을 해결하는 최고 권위로 여겨졌으며, 여기서 나온 교리적 결정들은 기독교 역사에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교황, 최후의 항소 법원으로

3세기경 로마 주교들은 지역 주교들이 해결 못한 문제들에 대해 '최고 항소 법원'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악성 루머와 박해

로마 제국의 타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타 신을 버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신자들은 비기독교 의식 참여가 금지되어 공적 생활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이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신들을 모욕한다'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초기 로마 기독교인들이 의식을 비밀리에 거행하자, 대중 사이에는 '기독교인들은 문란하고, 근친상간을 하며, 인육을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지방 관리들은 이런 소문 탓에 기독교인들을 범죄자로 박해했습니다.

조직적인 박해

3세기 말 조직적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기독교인 때문에 로마의 신들이 노해 제국에 군사·정치·경제 위기가 왔다며 칙령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처벌받았습니다. 투옥, 고문, 강제 노역, 거세, 매춘소 강제 이송 등이 자행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도망쳤고,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거나 공포에 굴복해 신앙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도나투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의 분열

이 시기 성직자의 자격 문제를 두고 기독교 내부에서 도나투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로 갈라지는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황제의 기독교 공인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가톨릭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수도 이전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비잔티움(비잔티움)으로 옮겼고, 훗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를 건설했습니다.

아리우스파와 가톨릭의 분열

325년 예수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아리우스설(Arianism)' 논쟁이 일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아리우스설은 배척되었고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신성이 확정되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아리우스파 기독교인'이 '가톨릭'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국교 선포

380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되었습니다.

성경 정경 확정

382년 로마 회의에서 구약과 신약의 정경 목록을 담은 첫 공식 칙령이 발표되었습니다.

일치된 그리스도교 세계 건설 노력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문서상 3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로 표기됨)가 열렸습니다. 처음 7차 보편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전통적 합의를 도출하고 통일된 그리스도교 세계를 세우려 노력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기독교 원칙을 요약한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이 공포되었습니다. 이 공의회는 교회 관구를 '교구(Diocese)'라 부르는 지리·행정 구역으로 획정했습니다.

라틴어의 공용어화

고대 로마 제국에서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된 라틴어가 쓰였습니다. 라틴어는 인도유럽어족 이탈리아어파에 속하며 오늘날에도 산스크리트어와 유사합니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등이 라틴어에서 나왔으나 영어는 별개 계통입니다.

4세기 교황 다마소 1세는 비서 성 예로니모에게 고전 라틴어로 성경을 새로 번역하게 했습니다(불가타 역). 교회는 라틴어로 사고하고 기도하게 되었으며, 라틴어는 로마 전례의 전례어로,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회와 바티칸 시국의 공용어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사어'로 분류되지만 교회의 공식 언어 지위는 유지됩니다.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의 분열

에페소 공의회(431)와 칼케돈 공의회(451)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관계를 정의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 해석에 불복해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모노피시트)로 갈라졌습니다.

교황권의 신장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를 떠나 비잔티움으로 간 후 500년까지 교황 권한은 꾸준히 커졌습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가 로마 주교 다음으로 제2의 위상과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되었습니다.

게르만 부족의 개종

서로마 제국 멸망(410) 즈음 많은 유럽 부족이 기독교화되었으나, 동고트·서고트·부르군트·반달족 등은 이미 이단으로 단죄된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아리우스파 게르만족과 가톨릭의 대립

이 부족들이 서로마 영토에 나라를 세우자, 아리우스파 게르만족과 로마 가톨릭 사이에 종교 갈등이 생겼습니다.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 1세(497)는 타 부족 왕들과 달리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이로써 프랑크족은 이탈리아에 살던 북유럽 부족들과 달리 교황과 직접 연결되어 입지가 강화되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프랑크족을 본받아 589년 스페인의 서고트족, 7세기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족이 가톨릭을 받아들였습니다.

성 베네딕토의 수도원 개혁

6세기 초 유럽 수도원들은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라 영적 중심지이자 예술·공예·필사·도서관·농업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인기가 크게 높아졌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잉글랜드 선교

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오 1세(540~604, '대 그레고리오')는 행정 개혁과 그레고리오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로마 원로원 의원 출신으로 정치계를 떠나 종교계에 들어왔습니다. 590년 교황에 선출되었습니다.

5세기 초까지 잉글랜드는 로마 제국 영토였으나 제국 해체 후 로마 영향과 기독교가 사라졌습니다. 독일계 '앵글족'이 들어와 토착 신을 섬기며 잉글랜드의 기독교를 말살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이 로마 노예 시장에서 팔리는 앵글족 아이들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동해 브리튼 섬 재복음화를 결심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를 파견했고, 켄트 왕 에텔베르트의 궁정에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에텔베르트가 프랑크 왕국의 기독교 공주와 결혼해 있어 쉽게 세례를 받고 캔터베리에 교회 건립을 허락했습니다. 이로써 잉글랜드 재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저술 활동

교황 그레고리오는 최고 지도자로서 탁월한 행정력을 보였습니다. 서간문에서 실용적 지혜와 행정 역량이 드러납니다. 당대 성경을 검토하고 기독교 핵심 가르침을 대화체로 정리했습니다. 라틴어 저작에서 난해한 주제를 설명할 때 주로 은유적 문체를 썼는데, 표면적 의미와 심층적 종교적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어 난해한 교리를 쉽게 전했습니다. 이교 신화 대신 성인전을 보급했으며, 모든 글을 포교 정신으로 썼습니다. 문체보다 사상 표현의 명료함을 중시했으나, 그 언어에 미학과 감동이 깃들어 있습니다.

남지중해 지역에서 교황 영향력 상실

7세기 무슬림 정복자들이 남지중해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사라졌습니다. 서방 기독교 세계 자체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

황제와 교황 관계 개선과 가톨릭 전파

로마의 카롤링거 왕조가 황제와 교황의 유대를 강화했습니다. 754년 프랑크 왕국의 어린 왕자 피핀(피핀 3세)이 교황 스테파노 2세로부터 성대한 대관식을 받았습니다.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물리치고 가톨릭 영토를 넓혔습니다. 아들 샤를마뉴(카를 대제)가 황제가 되자 세력을 급속히 확장해 782년 서방 제왕 중 최강의 기독교 군주가 되었습니다. 800년 로마에서 가톨릭 대관식을 받고, 황제로서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 개입권을 주장했습니다.

키릴 문자 발명

9세기 불가리아에서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 형제가 키릴 문자를 발명했습니다.

정교회의 가톨릭 교회 분리

9세기 성상 파괴 논쟁과 종교 화상 파괴가 로마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 새로운 분열을 불렀습니다. 로마 기독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 여러 성인의 상과 그림을 공경했으나 동방 기독교는 이를 초기 기독교 원칙에 어긋난다며 반대했습니다.

9세기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관할 남이탈리아와 불가리아 선교지에서 관할권 다툼이 벌어져 갈등이 심화되었고, 1054년 양 교회가 공식 분열했습니다. 분열 후 콘스탄티노플 교파는 '정교회(Orthodox)'로, 로마 교황과 일치하는 교회들은 '가톨릭'으로 불렸습니다.

이후 1274년 리옹 공의회와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화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습니다.

황제의 교황 권한 제한 시도

11~12세기 로마 교회 내 개혁 시도가 있었습니다. 1059년 교황 선거를 황제와 귀족 간섭에서 배제하려고 추기경단을 만들었습니다. 1122년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과 황제는 주교 임명을 교회법에 따르기로 합의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때 '수품권 논쟁(Investiture Controversy)'이 격화되었습니다. 황제가 주교에게 세속 권위 상징(지팡이와 반지)을 수여하며 교황 위에 군림하려 하자 교황이 이에 맞섰습니다.

중앙 교회 기구 설립

14세기 초 로마에 중앙집권적 교회 기구(중앙 교회 조직)가 세워졌습니다.

탁발 수도회 설립

프란치스코 아시시와 도미니코 데 구스만은 도시 생활에 성성을 불어넣고자 탁발 수도회를 창설했습니다. 이 회들은 대학 내 교회 영향력 확대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도미니코회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결합한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을 저술해 지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얀 후스와 존 위클리프의 화형

1305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로마를 떠나 프랑스 아비뇽으로 가면서 교황청이 프랑스 영향下에 들어갔습니다(아비뇽 유수). 1376년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며 아비뇽 교황청은 끝났으나, 1378년 로마와 아비뇽, 1409년 로마와 피사 사이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교황이 선출되는 대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서방 교회의 분열 원인 중 하나는 일부가 교황 단독 수위권 대신 집단적 권한(공의회주의)을 요구했고 이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가 교황이 되자 이 결정을 뒤집고 '교황이 예수로부터 권위를 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를 지지하며 영국의 존 위클리프는 '교회의 영구적 상태는 성경에 있으며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썼습니다. 프라하의 얀 후스는 이 선언에 반대했고 민중의 지지를 얻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어 산 채로 화형당했습니다.

교회 내 부패 개혁 시도

콘스탄츠, 바젤, 제5차 라테란 공의회가 교회 내 부패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1460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교황 비오 2세가 공의회 소집을 거부하자 로드리고 보르자(알렉산데르 6세)가 교황이 되었습니다. 율리오 2세는 스스로를 세속 군주 같은 교황으로 내세웠습니다.

16세기 초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을 출간해 교회 개혁 부재를 비판했습니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주교들에게 95개조 반박문을 보내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가톨릭 핵심 교리를 문제 삼았습니다. 스위스의 츠빙글리, 칼뱅 등도 가톨릭 교리를 비판했습니다. 이런 도전들이 모여 유럽 전역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번졌습니다.

종교전쟁의 시대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 슈말칼덴 동맹, 가톨릭 황제 카를 5세 간 9년 전쟁이 발발해 1518년 끔찍한 30년 전쟁으로 비화했습니다. 1562~1598년 프랑스에선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와 가톨릭 리그 간 '프랑스 종교전쟁'이 이어졌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첫 종교 관용 실험이 시작되어 프로테스탄트에게 시민·종교적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8세는 마지못해 이를 수용했습니다.

잉글랜드에선 헨리 8세 때 정치적 분쟁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황이 왕의 혼인 무효 청원을 거절하자 왕이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수도원·수도회·성당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말기에 교리·전례 개혁이 시작되어 에드워드 6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 때 이어졌습니다. 메리 1세 때 잠시 로마와 재일치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가 별도 교회를 세워 가톨릭 성직자를 통제하고 가톨릭 신자의 정치 참여를 막았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반종교개혁

1545~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반종교개혁을 주도했습니다. 핵심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하고, 화체설과 구원을 위한 믿음·희망·사랑과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구조 개혁도 단행해 성직자 교육을 강화하고 로마 쿠리아의 관할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반종교개혁 정신을 알리기 위해 교회는 예술·음악·건축에 '바로크 양식'을 장려했습니다. 16세기 중반 '예수회(Society of Jesus)'가 정식 설립되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필립보 네리 등의 저술이 교회에 새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17세기 후반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개혁

17세기 후반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교회 위계질서의 부정부패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성직 매매, 족벌주의, 교황청의 과도한 지출을 금지했습니다. 막대한 부채를 물려받았으나 선교 활동을 장려하고, 오스만 제국 침공에 맞서 유럽을 결속시키려 했으며, 유력 가톨릭 군주들이 프로테스탄트와 혼인할 수 있게 허락하고 종교 박해를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중세 가톨릭의 세계적 확장

중세 시대 가톨릭은 스페인, 포르투갈, 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로 퍼졌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신대륙에 대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인정하고 '파트्रो나투스(Patronatus)' 제도로 식민지 선교가 바티칸이 아닌 세속 권력 관할 하에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산업 시대

교황 레오 13세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적 도전에 응답해 회칙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을 발표했습니다. 가톨릭 사회 교리를 시작하며 노동 조건 규제, 생계 임금 보장, 노동조합 결성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교황 무오류 교리 확정

교리 문제에 대한 교회의 무오류성은 전통적 가르침이었습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이 '교황 무오류 교리'를 공식 선포했습니다.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 수녀회

1872년 요한 보스코와 마리아 마차렐로가 이탈리아에서 '돈 보스코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했습니다. 2009년 기준 14,420명으로 세계 최대 여성 가톨릭 단체가 되었습니다.

바티칸 시국 주권 인정

이탈리아 통일 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 분쟁이 생겼습니다. 1929년 라테란 조약으로 바티칸 주권이 승인되며 해결되었습니다.

20세기 가톨릭 성직자 박해

20세기 여러 나라에서 정치 극단주의자와 반성직자 정부가 가톨릭 교회를 탄압했습니다. 멕시코에서 3,000명 이상 성직자가 살해되거나 추방당했습니다. 교회가 모독당하고 수녀들이 성폭행당하며 사제들이 총살당했습니다.

소련에선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교회와 사제 탄압이 193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사형, 추방, 종교 재산 몰수, 교회 폐쇄가 일상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도 끔찍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 비오 11세는 멕시코·소련·스페인을 '공포의 삼각지대'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방관을 '침묵의 음모'라 칭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톨릭 신자와 유대인 박해

제2차 대전 전 나치 독일에서 교회가 탄압받았습니다. 1939년 9월 전쟁 발발 후 교회는 폴란드 침공과 1940년 나치의 공격을 규탄했습니다. 나치 점령지에서 수천 명의 가톨릭 사제·수녀·수도자가 투옥·처형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에디트 슈타인 등 성인도 희생되었습니다. 전시 중 교황 비오 12세는 교회 기구에 나치로부터 유대인 보호를 지시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비오 12세가 수백만 유대인 구출을 도왔다고 평가하나, 다른 역사가들은 반유대주의 조장과 나치 만행 방기 책임을 교회에 묻습니다.

공산주의 정권하의 가톨릭 박해

제2차 대전 후 동유럽 공산 정권들이 종교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일부 성직자가 정권에 협력했으나 많은 사제가 투옥·추방·처형되었습니다. 공산 지도자들은 교회가 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핵심 세력이 될 것이라 보았습니다. 1949년 중국 공산당 집권으로 모든 외국 선교사가 추방되고 애국 교회가 세워져 정부가 임명한 주교들이 들어섰습니다. 로마는 이들을 거부했으나 중국의 고집에 결국 받아들여 가톨릭 내부로 편입시켰습니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중국 내 모든 종교 시설이 폐쇄되었습니다. 수년 후 재개방되었으나 애국 교회 통제下에 놓였습니다. 많은 가톨릭 사제와 신부가 로마에 대한 충성을 거부해 투옥되었습니다.

정교회·개신교와의 화해 노력

교황 요한 23세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지지자들은 '창문 열기의 시작'이라 환영했습니다. 이 공의회는 라틴 전례의 예배 방식을 개혁했습니다.

교회 사명을 재정립하고 보편성을 재정의해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습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등 전통주의 가톨릭들은 공의회가 라틴 전례의 거룩함을 더럽히고 '거짓 종교'에 대한 종교적 무관심을 조장하며 역사적 가톨릭 교리와 전통과 타협했다고 혹평했습니다.

주교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 노벨평화상 수상

1996년 동티모르 분쟁의 정의롭고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주교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가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첫 비이탈리아인 교황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455년 만의 첫 비이탈리아인 교황이 되었습니다. 27년 재임은 역대 최장기 중 하나입니다. 소련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는 유럽 공산주의 붕괴 가속화의 공로를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돌렸습니다.

제3세계 채무 탕감과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성윤리 문제에서 강경 보수 단체 '오푸스 데이(Opus Dei)'를 성직자치회로 승인했습니다. 재임 중 1979년 칼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가 인도 빈민 구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 요한 바오로 2세는 중남미 해방 신학의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배격하며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차별적 정치나 혁명적 폭력에 의존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483명을 시성했는데, 이는 역대 모든 교황 시성 수의 총합보다 많았습니다.

유대교·이슬람교와 화해를 도모하고, 박해자들을 용서하며, 교회가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여기엔 유대인, 원주민, 이주민, 가난한 이들, 태아에 대한 종교적 불관용과 부정의가 포함됩니다. 1986년 세계 청소년의 날을 제정했습니다.

이 시기 인권·사회정의 운동으로 많은 가톨릭 사제·주교가 순교했습니다. 특히 중남미에서 1980년 엘살바도르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가 제대에서 암살당했고, 1989년 중미 대학교 예수회 사제 6명이 살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