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슈망 데 담 전투 (1917년 니벨 공세)

1917년 4월의 군사 상황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 조프르 장군이 대규모 공세를 결정한 것은 그가 여전히 지휘봉을 잡고 있던 때였다. 공세의 큰 틀은 정해져 있었다: 비미에서 랭스 사이의 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전선은 직각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비미와 수아송 사이는 남북으로, 수아송과 랭스 사이는 동서로 뻗어 있었다. 영국군은 비미-수아송 선에서, 프랑스군은 수아송-비미 선에서 공격해 독일군을 양쪽에서 협공할 계획이었다. 1916년 12월, 니벨이 조프르를 대신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조프르의 계획을 계승하되, 이 전선 구간에 최대한의 병력을 집중해 돌파구를 여는 것을 구상했다.

이러한 공세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듯, 독일군은 1917년 3월 15일부터 19일 사이에 힌덴부르크 선으로 철수했다. 전선 길이가 70km나 단축되었고, 직각 형태의 전선은 사라졌으며, 방어선은 비미에서 슈망 데 담을 거쳐 랭스까지 북서-남동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연합군은 이 철수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3주가 걸렸다. 애초의 공세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나, 니벨은 계획을 고수하며 영국군의 비미 공격과 프랑스군의 슈망 데 담 공격을 분리 수행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지형

슈망 데 담은 동서 방향으로 뻗은 석회암 고원으로, 남쪽의 엔 강 계곡과 북쪽의 아이예트 강 계곡 사이에 위치한다. 이 고원은 북쪽과 랭스-론 사이의 동쪽 평야, 그리고 수아송 방향의 남쪽 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다. 독일군은 1914년 9월부터 이 고원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천연 동굴(용의 동굴)을 확장하고, 후방과 참호를 연결하는 지하 통로를 파며, 기관총 진지를 구축하고 위장해 이곳을 천연 요새로 탈바꿈시켰다.

이곳은 1814년 3월 7일 크론 전투에서 나폴레옹 1세가 블뤼허 장군의 러-프 연합군을 격파한 전장이기도 하다. 그 이후 1914년 말까지 비교적 조용한 전선이었으며, 독일군이 능선을, 프랑스군이 경사면을 점유한 채 대치해왔다.

양측 전력

프랑스군

지휘 체계

작전 총지휘는 니벨이 맡았다. 현장에서는 미셸레르 장군 휘하에 마젤 장군(제5군), 망진 장군(제6군), 두셴 장군(제10군)이 배치되었다.

병력 구성

제5, 6, 10군으로 구성된 85만 병력에는 다수의 '돌격대'와 세네갈 티라유르 대대가 포함되었으며, 75mm 포 2,700문, 중포 2,300문(이 중 790문은 신형), 전차 200대가 지원했다.

독일군

지휘 체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프랑스 전선에서는 빌헬름 2세의 아들 크론프린츠가 제1군과 제7군을 지휘했다. 프리츠 폰 벨로가 제1군,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가 제7군, 카를 폰 아이넴(폰 로트말러)이 제3군을 이끌었으며, 아이넴은 1914년 9월 15일부터 제3군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병력 구성

뵘-에르몰리가 3월 11일부터 지휘한 제7군은 14개 사단으로 복스아이용에서 베리오바크까지 배치되었다. 베리오바크 남쪽은 벨로 장군이 맡았다. 독일군은 엄폐된 기관총 진지와 능선과 연결된 훌륭한 지하 통로망을 갖춘 견고한 방어 지역에 자리 잡았고, 제공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전투기 530대를 보유했다.

프랑스군의 계획

30km 전선에 전력을 최대한 집중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대규모 포격으로 전선을 초토화한 뒤, 포병의 엄호 사격 아래 보병이 돌격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프랑스군이 저지대에서 요새화된 경사면을 공격해야 하는 극도로 불리한 지형을 고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30km 전선에 걸친 포격은 요새 하나를 공격할 때만큼 조밀할 수 없었다.

목표

니벨의 구상은 1916년 가을 베르됭에서 잃었던 땅을 되찾았던 방식대로 슈망 데 담 전선에서 돌파구를 여는 것이었다. 전선이 뚫리면 예비군을 투입해 틈새를 확대하고 독일군의 붕괴를 노렸다. 이를 위해 기병 2개 군단을 예비군에 배속해, 참호전의 진창에서 벗어나 기병 본연의 임무를 맡길 예정이었다.

진격 속도는 매우 빨라야 했다. 망진 장군은 3분에 100m씩 전진해야 한다고 계산했다. 이에 따라 제6군은 첫날 저녁까지 아이예트 강을 건너고, D+1일에는 론 평원에, D+4일에는 솜 강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수단

니벨은 북부군집단과 중앙군집단 사이에 '예비군집단(GAR)'을 편성했다. 제5, 6, 10군 3개 군으로 구성되며, 제5·6군이 돌파를, 두셴의 제10군이 예비로 성공을 확대하는 역할이었다. 총 17개 군단, 56개 사단(식민지 보병 4개, 기병 5개 사단 포함) 규모였다.

포병 출신인 니벨은 화력에 큰 기대를 걸었다. 다수의 장거리 중포로 전선 진지를 궤멸시키고, 증원군 차단과 독일 포병 제압을 동시에 노렸다. 프랑스군 최초로 전차(슈나이더, 생샤몽)가 대규모로 투입됐다. 전차는 슈망 데 담 경사면을 피해 동쪽(베리오바크, 보수 그룹)과 서쪽(라포, 르페브르 그룹)에서 보병을 지원하며 철조망 절단과 기관총 진지 제압을 맡았다. 단독 행동은 상정하지 않았으며, 짧은 항속거리로 장시간 작전은 불가능했다.

계획의 약점은 보급로였다. 엔 강이 슈망 데 담과 평행하게 흐르며 독일 관측소의 직접 사정권 안에 있어, 증원·탄약 수송과 부상자 후송이 도하 지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전술

보병

보병은 '돌격 복장'으로 싸워야 했다. 1917년 1월 보병 교범에 따르면, 담요를 천막 천에 말어 멜빵처럼 걸고, 개인 장구, 식량낭, 수류탄낭(이론상 5개이나 최대 16개 지급), 2리터 물통과 1리터 추가 물통, 방독면(가능하면 2개), 붕대, 식량, 탄약(120발)을 휴대하되, 배낭은 현장에 두고 간다. 그러나 제20군단처럼 완전 군장으로 돌격하는 부대도 있었으며, 이들은 6일 치 식량을 지녔다.

포병

포병은 제1, 2선 진지 파괴와 기확인 목표 타격이 임무였다. 포격 깊이가 깊어지면서 방어군이 받는 포격 밀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니벨이 요구한 3분당 100m의 엄호 사격 속도는, 베르됭 공세(4분당 100m)보다 빨랐다. 포탄 비가 그치자마자 독일군이 방어를 갖추기 전에 보병이 도달해야 했으나, 슈망 데 담의 경사면을 오르며 이를 수행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전차

194대의 전차는 에스티엔 장군의 집중 운용 원칙과 달리 여러 부대에 분산 배치되어 보병 지원 역할을 맡았다. 이동 시 종대, 전투 시 선대 형식을 취했으며, 지휘전차는 좌우에 2대, 우측에 1대를 거느렸다. 통신은 깃발 신호와 전서구에 의존했다. 각 전차 중대(AS)는 보병 1개 중대와 짝을 이뤘으나, 실전에서는 독일군 포화 아래 보병이 전차를 따라잡지 못했다.

전장 상황

공세 개시 시점의 기상 조건은 최악이었다. 1917년 봄, 거의 지속된 비로 지면은 진창이 되었고, 포병 준비 사격을 방해해 목표 타격에 실패했다. 4월 16일 돌격한 프랑스군은 포격으로 거의 손상되지 않은 독일 진지와 맞닥뜨렸다. 심지어 4월 16일에는 눈까지 내렸고, 코트다쥐르에서 훈련한 세네갈 병사들은 강추위에 동상 피해를 입었다. 포격으로 식생이 사라지고 포탄 구덩이만 남은 달 표면 같은 지형은 끊임없이 포탄에 뒤집혀 발이 빠지고 미끄러지는 악몽이었다. 5월엔 덥고 뇌우가 잦았다.

제1차 돌격: 4월 16일

대규모 포병 준비 후 4월 16일 오전 6시, 프랑스군의 돌격이 시작됐다. 막대한 손실에도 제1선 독일 진지를 돌파하고 약 22,000명의 포로를 잡았으나, 동굴에 엄폐된 수많은 기관총 진지가 버틴 제2선에서 저지당했다. 공격 측에 엄폐물이 거의 없는 지형적 불리함이 컸다. 동쪽 베리오바크 구역에 투입된 전차들도 포탄 구덩이에 발이 묶이고, 뭉쳐서 공격하던 슈나이더 전차들이 포격의 좋은 표적이 되어 큰 전과를 못 올렸다. 이 구역에선 독일군이 잃었던 땅을 되찾기까지 했다. 캘리포니아 고원과 콩데쉬르엔 요새 점령 등 제한적 전과만 남긴 채 공세는 4월 21일 중단됐다.

제2차 돌격: 5월 4일

이번엔 예비대인 제10군이 크론과 우르트비즈 사이의 동부 구간에서 제9, 18군단을 투입해 공격했다. 5월 4일 제36사단이 크론 폐허를 점령했고, 이튿날 캘리포니아 고원과 카즈마트 고원 쟁탈전이 벌어져 거점을 마련했으나 아이예트 강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제18군단 생존자들에겐 브랜디 추가 배급이 내려졌다. 5월 말까지 이어진 공세는 이렇다 할 전과 없이 끝났고, 이 기간 수많은 희생과 참혹한 참호 생활에 반발한 퓌유(프랑스 보병)들의 항명이 잇따랐다.

결과

군사적 측면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전략적 패배였다. 몇 개의 관측소와 훌륭한 지하 참호를 얻은 것 외에 전술적 성과는 없었다. 조사위원회(위원장 브뤼제르 장군)는 니벨에게 면죄부를 주었으나, "준비와 실행 모두에서 니벨 장군은 스스로 짊어진 압도적 임무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 실패로 마젤(제5군)과 망진(제6군) 장군이 미셸레르와 메스트르로 교체됐다. 5월 15일, 필리프 페탱이 니벨의 후임으로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군심 수습과 항명 진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피해

이 전투는 프랑스군에 거의 완전한 실패이자 대학살로 끝났다. 결전이라던 전투가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난 것이다:

  • 프랑스군 11만 명 전사·부상(전력 외 손실)
  • 독일군 6만~8만 명

이 끔찍한 손실이 '1917년 항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군법회의는 3,427건을 유죄 판결하고 554건에 사형을 선고했다. 페탱은 7차례나 사면 건의를 거부했고, 49명의 항명 병사가 총살됐다. 슈망 데 담 전투의 심장부인 크론의 이름은 '크론의 노래(La Chanson de Craonne)'와 함께 1차 대전 항명의 상징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