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작전의 위험한 구상은 '기습이 성공할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렘노스에서 벌어진 오류와 잘못된 기동으로 빚어진 소동을 떠올려보면, 독일 원수 리만 폰 산더스가 지휘하는 튀르크 군이 해협을 방어하는 제5군에 고도의 경계 태세를 취했더라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리만 폰 산더스의 방어 준비
제5군 6개 사단 중 3개는 반도 남부에 집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3개는 기동 예비대로 활용되거나 연합군의 침공이 우려되는 아시아 쪽 해안 방어 공사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리만 폰 산더스에게는 반도 남부를 굽어보는 산악 지대의 방어를 준비할 한 달이 주어졌다.
그는 먼저 6만 명의 병사들에게 가파른 언덕을 신속히 통과하는 훈련을 실시했고, 이후 침공 함대의 포격 준비를 피하기 위해 병력을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배치하며 상륙 해안을 내려다보는 절벽에는 방어선만 남겼다. 염소가 다니던 좁은 길밖에 없던 곳에 도로를 개설했고, 밭과 농장 울타리에서 뜯어낸 말뚝과 철조망으로 이미 험난한 지형을 온통 뒤덮었다. 나아가 이러한 초보적인 방어 시설을 바닷물에 잠겨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해변까지 연장했다.
아나톨리아 보병과 무스타파 케말
물론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였던 이 시기에 튀르크 군은 뚜렷한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독일 원수는 완강한 아나톨리아 보병들에게 기댈 수 있었다. 그들의 투지는 부족한 무장과 불안정한 보급을 부분적이나마 만회해 줄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제19사단을 지휘하는 젊은 튀르크 장군,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믿을 수 있었다. 훗날 역사는 그를 '아타튀르크'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된다.
연합군의 상륙 계획
연합군 쪽에서는 7만 8천 명 규모의 원정군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고, 렘노스 기지를 떠나라는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력한 함대가 새벽이 밝기 전에 시작될 상륙 작전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병력들은 모터 보트에 견인된 상륙정에 탑승한 채 해안에 접근할 때까지 대기하고, 해안에서 50미터 거리에 이르면 보트가 밧줄을 풀고 상륙정들은 노를 저어 마지막 구간을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작전이 끝날 때까지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가바테페 앞바다에서의 함포 사격 준비는 취소되었다. 함포는 사면을 따라 전진하는 보병을 지원하고, 이후 상륙한 야전 포병이 임무를 인계받도록 계획되었다. 불행히도 함포는 지상 포병의 유탄포와 마찬가지로, 오르막에서 벌어지는 전투—사실상 백병전에 가까운 전투—에 투입된 병력에게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다.
출항
1915년 4월 18일, 영프 원정군은 다시 행동 준비를 마쳤다. 이번에는 적재를 제대로 마친 선박들이 긴 호위 대열을 이루며 북쪽, 갈리폴리 반도를 향해 항해했다.
4월 23일, 이언 해밀턴 경 장군은 담백한 명령문을 통해 작전의 개시와 목표, 그리고 수단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