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스 곶 상륙 작전의 개요
헬레스 곶(Cape Helles) 주변의 상륙 작전은 가바테페(Krithia 방면) 앞에서 진행된 ANZAC(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군단)의 상륙과 거의 같은 시각에 시작되었다. 상륙 지점은 알파벳 S, V, W, X, Y로 표시된 다섯 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작전의 핵심: 리버 클라이드호 좌초 계획
작전의 백미는 세드울바흐르(Sedd el-Bahr) 바로 앞 해안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영국군은 제29사단 병력을 가득 태운 낡은 석탄 운반선 '리버 클라이드(River Clyde)'호를 일부러 해안에 좌초시키고, 두 척의 바지선으로 선체와 해변 사이의 공간을 메워 병력이 직접 육지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상륙에 앞서 함대의 대형 함포들이 집중 포격을 퍼부었다. 포격은 오스만 제국군의 모든 진지를 제압하고, 최초의 상륙정이 해안에 접근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X, Y, S 해변에서는 충실히 지켜져 대규모 상륙 부대가 큰 저항 없이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W 해변, 특히 리버 클라이드호가 제88여단 병력 2,000명을 상륙시키기로 했던 V 해변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V 해변의 참극
함포 사격이 이어지는 동안 터키군은 최전선 병력을 후방으로 물려 해안 접근로를 거의 비워두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강한 해류가 배를 바다 쪽으로 밀어내면서 늙은 석탄선의 항해가 크게 지연되었고, 리버 클라이드호는 포격이 끝난 지 한참 후에야 해안에 닿았다. 터키군은 진지로 복귀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고, V와 W 해변을 내려다보는 세드울바흐르의 '유럽 성' 요새마저 다시 장악했다.
리버 클라이드호가 해안에 닿는 순간, 더블린 퓨질리어 연대와 먼스터 퓨질리어 연대, 햄프셔 연대 병사들 위로 화망이 쏟아졌다. 극소수만이 절벽 자락의 임시 은신처에 도달했을 뿐이다. 많은 소대 단위 부대가 해변 끝에 설치된 철조망에 걸린 채 사살되었다. 제88여단장은 상륙 초기에 전사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V 해변의 참상을 보고받은 지휘부는 이 구역의 작전을 밤까지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W 해변과 다른 해변들의 상황
북쪽 W 해변의 랭커셔 소총병들 역시 형편이 나았지 않지만,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터키군을 고지대로 몰아낸 뒤, 해변 북쪽 암석 곶에 숨어 상륙한 분견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낮 동안 S, W, X, Y 해변 간의 연결이 이루어졌다. 저녁에는 리버 클라이드호의 생존자들이 어둠에 편승해 차례로 상륙하여, 마중을 나온 W 해변 부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프랑스군의 아시아 쪽 교두보
한편 프랑스군은 함대의 격렬한 포격에 힘입어 쿰칼레(Kum Kale) 앞 아시아 쪽 해안에 큰 어려움 없이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들은 터키군의 두 차례 반격을 총검전으로 격퇴하며 교두보를 조금씩 넓혀 '아시아 성'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군은 해협 유럽 쪽 영국군 우익을 강화하기 위해 철수 명령을 받고, 리버 클라이드호 잔해가 놓인 악명 높은 V 해변에 기지를 세우게 되었다.
쿰칼레 일대에서 터키군 전선을 돌파하지 못한 것이 이유였던 이언 해밀턴 경의 이 결정은 명백한 전술적 실수였다. 적은 아시아 쪽 해안에 중포를 설치해 유럽 쪽 진지의 영·프 연합군을 괴롭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6월 30일에는 아시아 쪽에서 발사된 포탄이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데마드(d'Amade) 장군의 후임인 구로(Gouraud) 장군에게 중상을 입혔다.
교착 상태와 잠수함의 위협
5월 6일부터 8일까지 남부 지구의 연합군은 아치바바(Achi Baba)와 크리티아(Krithia) 방면으로 대공세를 감행했지만 적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빈약한 전과에 비해 인명 손실은 또 한 번 막대했다. 터키군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전황은 프랑스 서부 전선과 흡사한 진지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육지에서 용기와 인내로 쟁취한 몇 평방킬로미터의 산악 지대라는 반쪽짜리 성과는, 반도 앞바다에 출현한 적 잠수함이라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크게 무색해진다. 영국 전함 골리앗(Goliath, 어뢰정에 의해 격침), 트라이엄프(Triumph), 마제스틱(Majestic)이 해안 근해에서 침몰했다. 결국 함대는 더 남쪽 렘노스(Lemnos) 섬의 피항지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연합군은 해상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