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다르다넬스 전역: 수블라 만에 내린 영국군, 그리고 무너진 계획

1915년 8월 초, 다르다넬스 원정은 사실상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었다. 상륙 작전과 초기 전투가 벌어진 5주 동안 원정군 가운데 6만 명이 전력에서 이탈했다. 영국군 4만 명, 프랑스군 2만 명이었다.

막대한 손실에 비해 미미한 성과

이러한 희생에 비해 확보한 영토는 미미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스만 제국군 10만 명을 갈리폴리에 묶어두는 것이 러시아 전선에 아무런 완화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불가리아가 동맹국(중앙열강) 진영에 서서 참전하는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프랑스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 쪽도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수블라 만 상륙 작전

이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군은 8월 6일, ANZAC(호주·뉴질랜드 군단) 진지에서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수블라 만(Suvla Bay)에 두 개 사단을 상륙시켰다. 그러나 지휘가 부실했고 실전 경험이 부족한 이 부대들은 지형 정비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고, 그 결과 터키군은 불라이르(Bulair) 방면에서 병력을 끌어모을 뜻밖의 시간을 얻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교두보 밖으로 나아가기조차 힘들었고, 해안을 따라 아리 부르누(Ari Burnu) 방면으로 진격하며 ANZAC 군단과 합류하는 데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불가리아의 참전, 무너진 런던의 계획

바로 이 시점에 불가리아가 전쟁에 뛰어들면서 런던의 계획은 완전히 뒤흔들렸다. 키치너 경(Lord Kitchener)은 갈리폴리 전선을 신속히 시찰한 뒤, 수블라 철수와 헬레스 곶(Cape Helles) 교두보 유지를 권고했다.

이미 바유 장군(General Bailloud)이 지휘하는 프랑스 한 개 사단이 살로니카(Salonika)로 향한 데 이어, 곧 영국 한 개 사단도 뒤따랐다. 이제 발칸 반도의 전쟁 운명은 아드리아해에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늦어진 결단, 남겨진 과제

영국과 프랑스가 해협을 다시 열기 위해 새로운 원정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 지역에서의 모든 공세 작전은 결국 중단될 운명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단 하나였다. 연합군이 이 거대한 덫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그리고 철수가 재앙으로 변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