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너 계획에 맞선 브륄라르 장군
갈리폴리에 남아 있던 마지막 프랑스 사단을 지휘하던 브륄라르(Brûlard) 장군은 키치너(Kitchener)의 철수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는 수블라(Suvla)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하면 튀르키예군이 그 전력을 카페 헬레스(Cape Hellès) 방면에 집중시켜 두 배로 늘어난 적과 맞서야 한다고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그의 논거를 비롯해 더 큰 범위에서 제기된 여러 의견은 런던과 파리 양쪽에서 검토되었고, 결국 연합군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라는 선택 앞에 놓였습니다.
남은 길은 오직 철수
작전의 주도권을 쥔 영국으로서는 발칸반도, 튀르키예, 중동으로 병력을 계속 분산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철수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번 철수는 이 재앙 같은 전역에서 연합군이 거둔 유일한 성공이 됩니다. 그러나 임무 자체는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수만 명의 병력을 밤사이에 선적하고, 장비는 최대한 남기지 않으면서, 튀르키예군에게 아무런 의심도 사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옥'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던 갈리폴리의 겨울
혹독한 겨울이 전선 전체를 덮치고 있었습니다. 시체를 나눠 먹던 파리 떼와 청소동물들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흉포한 쥐들의 군단이 대신했습니다.
병사들은 이미 저항력의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어느 날 아침, 매서운 추위가 덮친 그대로 한 영국 연대의 소대가 얼어 죽은 채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튀르키예군 진지는 불과 수십 미터 거리에 있었고, 고지대에서는 아군의 모든 움직임이 감시당했습니다. 매서운 공기를 타고 어떤 소리든 멀리 전달되었으며, 무기는 자주 고장 나고 보급은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후방 야전병원은 환자와 부상자로 가득 찼습니다. 갈리폴리가 '지옥'이라는 이름을 이토록 잘 증명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비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철수 작전이 치밀하게 계획되기 시작했습니다.
교묘한 기만 작전: '마취'당하는 적
먼저 일반 예비대가 은밀히 렘노스(Lemnos) 섬으로 옮겨졌습니다. 12월 13일부터 18일까지 각 최전선 부대는 병력이 조금씩 빠져나갔지만, 동시에 평소와 같은 활동 수준을 유지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부대들은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계속 행军하며 빈 참호에서 가짜 움직임을 만들어냈고, 정해진 시각에 짧고 강렬한 산발 포격이 터지는 긴 정적에 튀르키예군을 점차 익숙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적을 '마취'시키는 데 성공하면, 12월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밤에 후위 부대가 '발끝으로 걷듯'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한편 이런 기만술에 능한 영국군은 밤에 병력을 철수시켜 바지선에 태운 뒤, 새벽이 되면 마치 장비를 실어 온 것처럼 보이며 되돌아오는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겨울을 넘기기 위해 전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듯한 착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모든 통신 참호에는 적의 진격을 늦출 방벽이 설치되었고, 소수의 기관총이 끝까지 적을 현혹할 수 있는 엄호 진지도 구축되었습니다.
12월 19일 밤, 8만 3천 명의 증발
1915년 12월 19일, 아리 부르누(Ari Burnu) 일대의 수블라 전 구역을 지키는 병력은 불과 3,000명이 남았습니다. 그중 1,500명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최전선이 여전히 활기 넘치는 듯한 가짜 분위기를 연출했고, 튀르키예군은 그곳에 대규모 병력이 주둔 중이라고 믿었습니다. 지속적인 긴장감이 유지되는 동안 철수 움직임은 완벽하게 가려졌습니다.
12월 19일 해질녘, 대포들은 마지막 포성을 울린 뒤 선적을 위해 해체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자정이 되자 매일 밤처럼 전선 전체의 포격이 멎었습니다.
새벽 1시 45분, 뉴질랜드 여단이 담당한 구역에서 기관총 사수가 세 번의 점사를 발사했습니다. 이는 상륙 지점에서 가장 먼 부대부터 철수를 개시하라는, 보병들이 기다리던 신호였습니다.
해가 떠오를 무렵, 수블라와 아리 부르누 사이 해안을 지키던 83,000명의 병력은 문자 그대로 증발한 상태였습니다. 해변에 불타버린 버려진 장비들과 텅 빈 참호망만이 원정군의 흔적을 남길 뿐이었습니다. 튀르키예군이 자신들 앞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카페 헬레스에서 반복된 기적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1916년 1월 8일 같은 작전이 카페 헬레스 지역에서 또다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35,000명의 병력이 적의 눈앞에서, 아니 코앞에서 승선에 성공한 것입니다.
갈리폴리 작전은 대참사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피로 물든 실패였음은 분명합니다. 그 원인은 준비 과정의 부실함과 실행 과정의 즉흥성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중앙 열강을 배후에서 무너뜨려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겠다는 모든 희망은 산산조각 났고, 차르 러시아는 서방 동맹국들로부터 더 이상 실질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