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에리히 루덴도르프: 제1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실질적 지휘자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1865년 4월 9일 ~ 1937년 12월 22일)는 프로이센 포젠(오늘날 폴란드 포즈난) 근교의 크루셰브냐에서 태어나 바이에른 투칭에서 생을 마감한 독일의 군인입니다. 그는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사실상 최고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초 나치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다가 이후 거리를 두었지만, 끝까지 극우 성향은 유지했습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제1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실질적 지휘자

전쟁 이전

루덴도르프는 '에리히 폰 루덴도르프'가 아니라 '에리히 루덴도르프'였습니다. 귀족 작위(von)를 지닌 것은 융커 대가문 출신인 어머니 클라라 폰 템펠호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18세에 장교 계급을 따낸 루덴도르프는 보병 부대에서 복무한 뒤, 1894년 참모본부(Generalstab)에 발령받으며 군 경력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확고한 군국주의자였던 그는 "평화란 두 전쟁 사이의 짧은 간격에 불과하다"는 신념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프랑스 침공을 위한 슐리펜 계획 수립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직후 루덴도르프는 폰 뷜로가 지휘하는 제2군의 군수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제2군의 임무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리에주 요새를 함락하여 프랑스 영토로 통하는 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작전이 성공한 뒤 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함께 최고육군사령부(OHL)로 소환되었습니다. 1916년 8월 힌덴부르크가 팔켄하인을 대신해 독일군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하면서 이른바 '제3차 OHL' 체제가 출범했습니다.

탄넨베르크 전투(1914년 8월 26일~30일)에서 삼소노프 장군의 러시아 제2군을 격파한 공로로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의 군수참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분리 불가능한 콤비가 되어 점차 독일의 실질적 의사결정자로 부상했고, 빌헬름 2세 황제는 명목상 존재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해상 우위에 맞선 루덴도르프는 잠수함 함대를 과도하게 동원하는 총력전을 주창했습니다. 루시타니아호를 비롯한 수많은 민간 선박을 격침시킨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결국 미국의 참전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17년에는 혁명 정권 하의 러시아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동부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할 수 있게 되자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1918년 봄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세의 실패와 미군의 도착이 겹치면서 두 사람은 전쟁 승리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휴전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은 국회(Reichstag)의 여론과도 일치했습니다. 그럼에도 루덴도르프는 휴전 서명 이후 입장을 번복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가 같은 해 10월 사임해야 했습니다.

전후 활동과 나치와의 관계

휴전 이후 스웨덴으로 건너간 루덴도르프는 군사 전술에 관한 저술과 함께, SPD(독일 사회민주당) 중심의 정치 세력이 독일을 배신했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저술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은 독일군이 후방 정치가들의 배신으로 무너졌다는 이른바 '배후중상설(Dolchstoßlegende)'을 널리 퍼뜨린 주요 선전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20년 히틀러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루덴도르프는 독일로 돌아왔고, 1923년 실패로 끝난 맥주홀 폭동에 가담했습니다. 1924년에는 나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925년, 히틀러는 그를 실추시키기 위해 승산 없는 선거에 출마하도록 압박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1차 투표에서 고작 1.1%를 득표하며, 옛 상관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히틀러는 측근에게 "완벽해. 우리는 그에게 결정타를 날렸다"고 내비쳤습니다.

패배에서 회복하지 못한 루덴도르프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아내 마틸데와 함께 '탄넨베르크 동맹(Tannenbergbund)'이라는 뵐키시(völkisch) 성향의 종교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나치 이데올로그들조차 기피할 만큼 특이한 성격을 지녔으며, 오늘날에도 '분트 퓌어 고테스에르켄트니스(Bund für Gotteserkenntnis)'라는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신도들은 때때로 '루덴도르퍼'라고 불립니다.

옛 동맹이 나치 운동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1927년 그를 프리메이슨이라고 공개 비난했습니다. 완전히 변두리로 밀려난 노장군은 1928년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말년과 예언적 경고

1933년 1월 30일, 옛 동료였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접한 루덴도르프는 놀랍도록 예언적인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엄숙히 예언한다. 저 저열한 인간이 우리 민족을 불명예의 심연으로 이끌 것이다(...). 미래 세대는 당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당신의 무덤에서 저주할 것이다." (이언 커쇼, 『히틀러』 1권, 플라마리옹, 2000)

루덴도르프는 1935년 히틀러가 제안한 원수 작위를 거부한 뒤, 1937년 12월 22일 72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