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에리히 폰 팔켄하인: '프랑스군을 백색화'하려던 베르됭 공세의 설계자

에리히 폰 팔켄하인:  프랑스군을 백색화 하려던 베르됭 공세의 설계자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1861년 11월 11일 부르크 벨히아우(Burg Belchau, 오늘날 폴란드 비아우치)에서 태어나 1922년 4월 8일 포츠담에서 세상을 떠난 독일의 군인이었다. 그는 1914년 9월부터 1916년 8월까지 독일군 최고사령관을 지냈으며, 특히 '프랑스군을 백색화(bleed white)한다'는 목표 아래 기획된 베르됭 공세의 설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암투의 소굴이 된 독일 최고사령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고사령부는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폰 몰트케(von Moltke)의 뒤를 이어 서부전선 참모총장에 오른 순간부터 권력 암투의 소굴로 변해갔다. 교만하고 독설이 서슬 퍼랐던 그는 성격과 날카로운 말버릇 때문에 동료 장성 대다수에게 적대감을 샀고, 결국 황제 빌헬름 2세의 후광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팔켄하인은 동부전선 '파벌'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베르됭 공세를 구상했다. 결국 그의 실패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그를 대신하여 독일의 실질적 지배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은 독일을 이끌고 1918년 패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팔켄하인에 대한 세 가지 비판

역사학자들은 팔켄하인에게 크게 세 가지 비판을 제기한다. 첫째, 그는 베르됭 공세에 대해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공세는 동맹국들에게 완전한 기습이었다. 둘째, 프랑스군의 저항 능력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했다. 셋째, 소모전이라는 자신의 전략적 의도를 현장 지휘관들에게 끝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몰락과 말년

베르됭에서의 계획 실패와 연합군의 솜(Somme) 공세 직전, 팔켄하인은 실각했다. 이후 그는 1916년부터 1917년까지 루마니아 전역에 참전하며 명예 회복을 시도했다.

그가 3인칭으로 집필한 회고록에는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의 오만함과 자기 만족이 드러난다. 192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팔켄하인은 전투에서 독일 병사 한 명이 죽을 때마다 프랑스군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을 끝내 거두지 않았으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손자

흥미롭게도 그의 손자 헤닝 폰 트레슈코프(Henning von Tresckow)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장교로서 아돌프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인물이다. 할아버지가 제국의 군인이었다면, 손자는 나치 체제에 맞선 저항자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