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를 깊은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에 빠뜨렸습니다. 공포정치가 끝난 뒤 총재정부는 권력을 확립하는 데 실패했고, 이러한 취약성은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와 제정 선포로 이어졌습니다. 정복과 영광을 누린 황제였지만, 결국 외세 연합군에 밀려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복원했으나, 나폴레옹이 탈출하며 왕이 도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워털루 전투의 패배(1815)는 백일 만에 부활했던 제정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루이 18세가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권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그가 사망하자 사촌인 샤를 10세가 즉위했는데, 그는 강경한 왕당파여서 온건하지 못했습니다. 언론의 자유 등 새로 획득한 자유들을 억압하자, 1830년 7월 27~29일 3일간의 봉기인 '영광의 3일(Trois Glorieuses)'이 촉발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샤를 10세는 자신의 권력을 구속하던 헌장을 짓밟은 대가로 왕위를 잃고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샤를 10세의 사촌인 루이 필리프 1세가, 당시 하원의원이던 아돌프 티에르(훗날 장관과 각료회의 의장을 역임) 등의 주도로 왕위에 추대되었습니다. 7월 왕정 초기는 비교적 온건했지만, 국왕은 점차 보수 성향의 정부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재산 기준에 따른 선거권(선거 자격을 부여하는 납세 기준에 의존하는 선거 제도)을 폐지하고 남성 보통선거권으로 전환하려던 공화파들의 연회가 금지되면서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났고, 결국 국왕은 퇴위하여 망명했습니다. 군주제는 다시는 프랑스 왕위에 돌아오지 못했으며, 이것이 바로 제2공화국의 탄생이었습니다.
1851년 12월 2일, 운명의 날
핵심 인물
-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훗날의 나폴레옹 3세
- 아돌프 티에르 — 7월 왕정 시기 하원의원·장관·각료회의 의장, 훗날 제3공화국 초대 대통령
- 빅토르 위고 — 쿠데타에 맞서 저항한 대문호
쿠데타의 경과
새로 수립된 제2공화국은 남성 보통선거권을 확립하고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며 격변의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적 문제에 응답했습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8~1873)는 숙부 나폴레옹 1세의 실각 이후 망명 생활을 이어갔지만, 여러 지역구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48년 12월 10일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나 제2공화국 헌법은 현직 대통령의 재선 출마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1851년 7월 19일 헌법 개정을 제안해 재출마의 길을 열려 했지만, 필요한 표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12월 1일 밤부터 2일 새벽에 걸쳐, 엘리제 궁에서 리셉션이 열리는 동안 루이 나폴레옹의 측근들이 요소요소를 장악했고, 티에르를 비롯한 일부 의원들이 체포되었습니다. 민중이 봉기하자 진압은 잔혹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을 차단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유배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를 '국가 반역죄'로 규탄한 작가 빅토르 위고 역시 벨기에로, 이어서 영국령 제도(저지섬, 건지섬)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무혈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쿠데타의 주도자는 남성 보통선거권에 기반한 국민투표(플레비시터)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물었습니다. 이 국민투표는 1851년 12월 20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을 합법화했고, 그는 이제 헌법을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게 되어 1852년 1월 14일 새 헌법을 공포했습니다. 이로써 제정이 부활하여 제2제정(1852~1870)이 선포되었고,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결과와 영향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제2제정 아래에서 프랑스는 거의 20년에 걸친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