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자유당의 마지막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년 1월 17일 맨체스터 ~ 1945년 3월 26일 웨일스 라니스툼드위)는 드위포어의 로이드 조지 백작(1st Earl Lloyd George of Dwyfor)으로, 영국의 저명한 정치가이며 자유당 소속으로는 마지막 총리였습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자유당의 마지막 총리

웨일스 출신의 가난한 유년 시절

로이드 조지는 맨체스터에서 태어났지만 웨일스 가문의 후손입니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는 어머니와 함께 웨일스로 돌아가 정착했습니다. 그의 교육은 어머니와 숙부 리처드가 맡았는데, 리처드는 구두장이를 업으로 삼는 자유당원이자 열성적인 침례교 신자였습니다. 리처드는 당대의 도덕관과 정치 이념은 물론 프랑스어와 라틴어까지 가르쳤습니다.

15세부터 리버풀의 자유당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는 1884년 법률 공부를 마치고 크리시스에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고단했던 젊은 시절의 경험은 평생 동안 그가 "공작들"이라 부르던 특권층을 희생시키면서라도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정치 입문과 자유당 활동

승소한 재판을 계기로 "밀렵꾼들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농민조합을 설립했고, 1887년에는 웨일스 자치를 옹호하는 신문 《우드곤 흐디드(Udgorn Rhyddid, 자유의 나팔)》를 창간했습니다.

자유당에 입당한 그는 1890년 북웨일스 카나번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며 빠르게 정치적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1905년에는 헨리 캠벨배너먼 경의 새 자유당 내각에 무역청 장관으로 합류했고,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냈습니다.

재무장관 시절 그는 노령연금 제도를 도입했으며, 오늘날 '복지국가'라고 불리는 체계의 창시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 개혁은 귀족원(상원)의 거부권에 부딪혀 좌절되었고, 이에 따라 1911년 의회법은 귀족원의 거부권을 잠정적인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총리 취임

1914년까지 평화주의자로 여겨졌던 로이드 조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입장을 바꿔 1915년 새로 신설된 군수장관에 임명되었고, 1916년에는 육군장관을 지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자유당과 보수당은 자유당 소속 허버트 애스퀴스가 이끄는 연립정부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보수당은 애스퀴스의 교체를 강행했고, 1916년 12월 11일 로이드 조지가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유당은 분열을 겪게 됩니다.

베르사유 강화회의와 외교

로이드 조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라를 이끌었으며, 베르사유 강화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해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모두와 격돌했습니다.

그는 독일을 정치·경제적으로 징벌하려 했지만, 클레망소처럼 독일의 국력을 완전히 파괴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훗날 베르사유에서 어떻게 그런 결과를 이뤄냈느냐는 질문에 그는 위트 있게 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폴레옹 사이에 앉아 있었던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성과죠."

또한 그는 새로운 독일-폴란드 국경의 경로를 정하기 위해 주민투표를 실시하자는 안을 지지했습니다. 그 결과 그려진 국경은 매우 길고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어려웠으며, 이후 수많은 분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개혁의 한계와 아일랜드 독립

1922년 10월 20일까지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로이드 조지는 사회적 개혁을 추진했지만, 연정 파트너인 보수당에게 크게 발목을 잡혔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재임 중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아일랜드 독립을 승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영국 역사상 마지막 자유당 총리로 기록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러시아의 라스푸틴 제거 음모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변방에서의 말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약 20년 동안 로이드 조지는 정치의 변방에 머물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정계 복귀를 예측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929년에는 최장기 의원으로서 원로 의원(Dean of the House)이 되었고, 1931년에는 병으로 인해 국민연립정부 참여가 무산되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정부의 명을 받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영토 확장을 멈추도록 설득하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은퇴 직후 그는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