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조프르와 베르됭 전투: '후퇴 금지'를 명령한 총사령관의 선택

조프르와 베르됭 전투:  후퇴 금지 를 명령한 총사령관의 선택

1916년 2월, 조프르(Joffre)는 64세였다. 그는 베르됭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독일군의 역대 최대 규모 공세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조프르는 솜 전투가 더 중요한 우선 과제라고 판단해 들려오던 경고들을 외면했다. 그는 폭풍우로 독일군의 공격이 늦춰진 뒤에야 비로소 움직여 증원군을 파견했다. 이 시점부터 최전선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 전체의 휴가가 전면 중단되었다.

'후퇴 금지' 명령과 철저한 방어

1916년 2월 21일, 조프르는 후퇴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은 누구든 군사법정에 회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최전선을 사수하고 무엇보다 파리로 통하는 길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마른 전투 당시 그는 이미 이렇게 선언한 바 있다.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부대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확보한 진지를 지켜야 한다. 후퇴하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택해야 한다."

페탱에서 니벨로, 바뀌는 지휘관

베르됭 방어를 맡기 위해 조프르가 직접 임명한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은 1916년 3월 10일 수이(Souilly)에서 조프르와 합류했다. 페탱은 적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요구했지만, 조프르는 이러한 잦은 요구를 점점 지원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조프르는 페탱을 중앙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형식으로 베르됭에서 떼어내 버렸다. 이어 1916년 5월 1일, 조프르의 요청에 따라 로베르 니벨(Robert Nivelle)이 페탱의 뒤를 이었다. 니벨은 전임자보다 적은 병력을 요구했지만, 대량의 질 좋은 포병 화력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점에서는 전임자와 같은 생각이었다.

솜 공세와 조프르의 퇴진

6월 22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솜 공세를 준비했다. 거대한 포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영국군 측에서는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그중에는 식민지에서 동원된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공세하라"는 신념을 끝까지 고수하던 조프르는 상층부의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프랑스는 2년 넘게 반복된 공세로 온몸에 상처를 입었고, 겨우 확보한 진지마저 곧바로 빼앗기곤 했다. 결국 1916년 12월, 정부는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계속 소모되도록 두지 않겠다며 로베르 니벨을 새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조프르의 후계자로 세웠다. 물러나는 조프르에게는 프랑스 원수 칭호가 수여되었다.

조프르의 베르됭 방침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킨다'는 의지로 전선을 붙잡아 두었지만, 동시에 프랑스군의 처참한 손실을 낳았다. 베르됭 전투는 약 10개월간 이어지며 양측 합계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남긴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