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메르스엘케비르 사건: 두 해군의 비극적 결별

메르스엘케비르 사건: 두 해군의 비극적 결별

영국 항구에서 벌어진 프랑스 함대 접수 작전

1940년 7월 3일의 메르스엘케비르 작전은 영국 본토 항구에 정박한 프랑스 군함들을 접수하는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도록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그날 오후 3시 40분, 무장한 영국 수병들로 구성된 분견대는 포츠머스와 플리머스에 정박 중인 선박들에 조용히 접근했다. 기습 효과를 노린 이 작전은 대체로 성공했지만, 플리머스에 정박한 대형 잠수함 '쉬르쿠프(Surcouf)'호에서 예외적인 사고가 발생해 영국 장교 두 명이 부상을 입고 프랑스 장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선박의 장교와 수병들은 맨섬(Isle of Man)과 리버풀 인근에 마련된 별도 수용소에 억류되었으며, 사실상 전쟁 포로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한 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다수는 영국 선박을 통해 카사블랑카로 송환되었다.

다카르의 리슐리외 호 공격

카사블랑카에서는 완성되지 않아 주 무장이 갖춰지지 못한 전함 '장 바르(Jean-Bart)'호는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다카르에는 자매함인 '리슐리외(Richelieu)'호가 완전한 무장을 갖춘 채 정박해 있었다. 7월 7일, 소형 항공모함 '허미즈(Hermes)'호와 구축함 두 척으로 편성된 분함대가 온슬로 대령의 지휘 아래 다카르 항 앞에 나타났고, 부아송 총독은 오랑에서 전달된 것과 동일한 최후통첩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이후 허미즈호에서 출항한 모터보트가 항구에 진입해 리슐리외호의 선수 아래 기뢰 네 개를 설치했으나, 수심이 얕아 폭발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에는 어뢰 폭격기 여섯 대가 전함을 공격했고, 폭발한 유일한 어뢰가 선체에 손상을 입혔다. 열악한 현지 시설 탓에 수리에는 무려 1년이 걸렸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평화적 해결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고드프루아(Godfroy)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분함대—구식 전함 한 척, 순양함 네 척, 구축함 세 척—가 커닝햄(Cunningham) 제독의 동지중해 함대의 일부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양국 함대는 오랫동안 원활하게 협력해 왔고, 두 제독의 관계 역시 긴밀하고 우호적이었다.

커닝햄 제독은 6월 29일 해군본부가 제안한, 7월 3일 메르스엘케비르 작전과 동시에 프랑스 함선을 접수하자는 방침에 강력히 반대했다. 무력 사용 시 함선이 정박지에서 침몰해 항구 입구가 봉쇄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드프루아 제독과 협상 끝에 프랑스 함선이 연료를 하역하고 승조원을 축소하는 조건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7월 3일 고드프루아 제독은 파리 해군부로부터 즉시 출항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메르스엘케비르 사건을 접한 뒤로는 커닝햄과의 합의에 더 이상 구속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영국 제독은 외교적 수완과 단호함을 병행해 대응했고, 영국 장교들은 프랑스 장교 및 승조원들과 직접 협상에 나섰다. 마침내 7일, 영국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프랑스는 연료를 하역하고 함포 격발장치와 어뢰 발사관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무장을 해제한다는 내용의 서면 합의가 체결되었다.

무력 행사의 결단, 그리고 그 대가

무력 사용을 결정함으로써 영국 전시 내각은 비시(Vichy) 프랑스를 추축국 진영으로 밀어붙일 위험을 감수한 셈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함대 문제에서 보여준 양보와 다를란(Darlan) 제독이 자국 함대의 독일 접수를 막기 위해 취한 조치를 알고 있었다 해도, 내각은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처칠은 이미 이렇게 쓴 바 있다. “과거와 현재의 행동을 알고서도 히틀러의 말을 믿을 만한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과연 누구 있는가?”

그럼에도 프랑스 함대의 운명은 히틀러가 아니라 다를란의 손에 달려 있었다. 게다가 정전 협정 체결 후 프랑스는 비교적 온건한 해군 조항을 어길 경우 최악의 보복에 직면할 위협을 안고 있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가능했던 길

커닝햄 제독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무력 충돌 없이도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입증했다. 오란의 여건은 훨씬 까다로웠지만, 장술(Gensoul) 제독이 영국의 최후통첩을 받은 시점에 이미 함대 무장 해제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금만 더 인내심과 외교적 노력이 있었다면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독일군은 지중해 건너편에 위치해 있었고, 설령 함선을 접수할 수 있었다 해도 프랑스 승조원들은 복무를 거부했을 것이다. 외국 선박을 운용하려면 독일 승조원을 훈련시키는 데 몇 달이 걸려도 모자랐을 터였다.

메르스엘케비르가 남긴 여파

그렇기에 메르스엘케비르 사건이 프랑스 전역에 씁쓸함과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비시 정부는 여전히 순양전함 한 척, 200mm 함포를 장착한 순양함 네 척, 150mm 함포를 장착한 순양함 여섯 척, 구축함 30척, 잠수함 70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는 약 180대의 폭격기와 450대의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어, 이 전력이 추축국의 지중해 전력과 합류했다면 영국의 지중해 지위는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패배하여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오랑 사건에 대한 프랑스의 유일한 보복은 7월 5일 새벽 해군 항공대가 지브롤터의 H 부대(H Force)를 향해 감행한 실효성 없는 폭격이 전부였다. 다를란 제독은 현명하게 추가 적대 행위를 삼가고, 영국 함선이 프랑스 해안에서 20마일 이내로 접근할 경우에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5일, 양국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메르스엘케비르 사건의 즉각적인 결과 중 하나는 독일이 프랑스 함대의 완전한 무장 유지를 허용하게 된 것이었다. 북아프리카의 함선들은 툴롱(Toulon)으로 소집되었는데, 이곳은 영국의 공격 가능성으로부터는 더 안전했지만, 동시에 독일의 통제권에 더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결국 메르스엘케비르 사건은 프랑스 해군 전체에 깊은 반감을 남겼고, 대영 협력파의 선전 활동에 부채질을 했다. 반면 세계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싸워나가겠다는 영국의 결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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