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태국 전쟁(1940~1941)은 플랙 피분송그람(통칭 피분) 장군이 이끄는 태국과 비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벌인 전쟁이다.
전쟁의 배경
1940년 프랑스가 본토에서 무너지자, 태국 총리 피분은 오랜 숙원이던 영토 회복의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가 되찾고자 한 땅은 촐랄롱꼰 국왕 통치기에 프랑스에 할양했던 영토들로, 1904년의 메루프레이(Melou Prei)와 톤레푸(Tonlé Repou), 1907년의 바탐방·시소폰·시엠립 주였다. 이 지역들은 모두 캄보디아에 귀속되어 있었다. 또한 1893년 라오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고 1904년에 추가 영토를 잃으면서 겪었던 굴욕을 설욕할 계기이기도 했다.
한편 본토의 약화로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 유지는 점점 위험하고 어려워지고 있었다. 본국의 지원과 증원이 끊긴 식민지 행정부는 1940년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벌어진 랑선(Lạng Sơn) 공세에서 도시가 함락된 뒤,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침략에 대한 프랑스의 미약한 저항을 지켜본 피분 정권은 군사적 충돌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 확신했다.
발단과 작전
방콕에서 민족주의적이고 반프랑스적인 시위가 벌어진 뒤, 메콩강 국경을 따라 소규모 교전이 잇달아 일어났다. 수적으로 우세한 태국 공군은 낮에는 거의 제재 없이 비엔티안, 시소폰, 바탐방 등을 폭격했다. 프랑스 공군도 보복 폭격을 시도했지만 태국에 입힌 피해는 훨씬 적었다. 인도차이나 총독 장 드쿠(Jean Decoux) 제독은 태국 조종사들이 여러 전역을 경험한 베테랑처럼 비행했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같은 해 12월, 태국군은 파크라이(Pak-Lay)와 바싹(Bassac)을 점령했다.
1941년 1월 초, 부라파타이(Burapha Thai)군과 이산(Isaan)군이 라오스와 캄보디아 방면으로 대공세를 개시했다. 프랑스군은 즉각 저항에 나섰지만, 많은 부대가 더 잘 무장된 태국군에 밀렸다. 태국군은 라오스를 빠르게 장악했으며, 캄보디아에서는 프랑스군의 저항이 비교적 완강했다.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양당쿰(Yang Dang Khum)과 품프레악(Phum Preav)의 태국 마을들을 향해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다. 이곳에서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반격은 크게 깨져 후퇴로 끝났지만, 태국군 역시 프랑스 포병의 포격에 전차가 발목을 잡혀 추격하지 못했다.
코창 해전
육상 전황이 프랑스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던 상황에서, 장 드쿠 총독(1884~1963)은 인도차이나 해군 사령관 테로(Terraux) 제독에게 태국 해군에 대한 공격 작전을 승인했다.
가용한 군함들에게 타이만에서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1월 16일에는 삿타히브(Satahib, 방콕만 동쪽 끝)와 코창(Koh Chang) 일대에 대해 항공 정찰이 실시되었다.
1941년 1월 17일 아침, 순양함 '라모트피케(Lamotte-Picquet)', 식민지 슬루프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드말 샤르네르(Amiral Charner)', 그리고 슬루프 '마른(Marne)'과 '타튀르(Tahure)'로 구성된 임시 편대가 라모트피케의 함장 레지스 베랑제(Régis Bérenger) 대위의 지휘 아래 코창에서 태국의 해안경비함과 어뢰정들을 공격했다.
적 함대가 압도적으로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해군의 이 작전은 빛나게 수행되어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약 2시간 가까운 전투가 끝났을 때 태국 측의 손실은 막대했다. 어뢰정 '촌부리(Chomburi)'와 '송클라(Songkla)'는 침몰했고, 해안경비함 '돔부리(Dombhuri)'는 불타면서 전복되었다. 태국 함대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태국 측 사망자는 300명을 넘었고, 생존자는 고작 80명 남짓이었다.
이는 중요한 승리였다. 특히 1941년 1월 17일의 코창 해전은 프랑스가 거둔 마지막 해상 승리로 기록된다. 실제로 양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프랑스가 거둔 유일한 해전 승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1월 24일, 앙코르의 프랑스 비행장이 태국 폭격기의 공습을 받으면서 마지막 공중전이 벌어졌다.
이 전쟁으로 양측에서 약 3,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종전과 그 여파
태국의 군사적 협력을 확보하려던 일본은 신속히 분쟁에 개입해 중재에 나섰다. 최후통첩을 통해 양 교전국에 휴전이 강요되었고, 1941년 5월 9일 프랑스는 일본의 압력 아래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빼앗긴 바탐방과 시엠립('샴의 법'이라는 뜻) 주, 그리고 라오스에서 빼앗긴 참파삭(Champasak)과 사야부리(Sayaburi)를 태국에 할양했다. 이후 8월 21일에는 프랑스와 라오스 간에 또 다른 조약이 체결되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보호국 지위는 결국 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셈이다.
이 합병은 미국의 대일 석유 공급 중단(1941년)으로 이어졌으며, 영미 정보기관은 반일 비밀조직인 '타이 세리(Thaï Séri, 자유타이)'를 조직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태국을 공격하자 태국 국민과 의회는 일본에 맞서 움직였다. 프라추압키리칸 전투로 마무리된 짧은 전역 이후, 태국은 결국 일본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