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싱가포르 함락 직전: 처칠의 결사 항전 명령과 퍼시벌의 패배주의

처칠의 결사 항전 명령

20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에게 자신의 의지를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내는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이 점은 반드시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나는 땅 한 치도 양보하지 말 것,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모든 시설을 완전히 파괴할 것, 그리고 항복은 오랜 전투 끝에 싱가포르 시가지의 폐허 위에서나 비로소 고려될 수 있다는 뜻이다."

방어 계획을 둘러싼 갈등

그러나 다음 날 웨이벌이 자신의 계획을 아서 퍼시벌 중장에게 제시하자, 퍼시벌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약 32km × 17km 크기의 섬을 세 개 방면으로 나누어 방어하기로 선택했다. 호주군은 서쪽을, 영국군 제18사단은 북쪽을, 인도 예비 부대는 남쪽을 각각 담당하는 배치였다.

24일, 퍼시벌은 필요시 말레이 반도에서 섬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4일 뒤 이 작전을 1월 30일 밤부터 31일 새벽 사이에 실시하기로 확정했다. 그는 웨이벌에게 "전반적인 상황을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한다"고 경고했으며, 이후에는 더욱 절망적인 보고를 보냈다.

"결정적 위기 상황입니다. 적이 서해안의 대부분 병력을 차단하고 측면을 돌파했습니다. 모든 병력을 섬으로 회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공군은 이제 전투기 9대만 남았습니다…"

근위사단의 예상 밖 전력

니시무라 다케오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국 근위사단은 원래 전투 임무에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서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과정에서 이 부대는 다른 정예 일본군 부대에 전혀 뒤지지 않는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바크리와 파릿 술롱 사이 구간에서 근위사단은 조우한 연합군 부대 대부분을 궤멸시켰다.

늦게 도착한 증원군의 몰락

이 무렵 싱가포르에는 증원 부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1월 22일에는 인도 보병 제44여단 소속 7,000명이 상륙했고, 이틀 뒤에는 호주 병력 1,900명과 영국 제18사단의 주력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 부대는 현지 기후와 환경에 적응할 시간조차 없었다. 어떤 병사들은 긴 항해로 지쳐 걷기조차 버거운 상태였고, 상당수는 충분한 전투 훈련을 받지 못한 신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싱가포르에서 마주한 것은 질서 있는 방어 태세가 아니라 혼란과 만연한 패배주의 분위기였다. 결국 이 증원군마저 사기를 잃고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