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총검 돌격으로 예니체리를 몰살시킨 리므니크 전투… 평원에 흘린 터키의 피

총검 돌격으로 예니체리를 몰살시킨 리므니크 전투… 평원에 흘린 터키의 피

1789년 9월 22일, 오늘날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왈라키아에서 벌어진 리므니크 전투는 유명한 러시아 장군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와 오스트리아의 명장 작센코부르크 공작 요시아스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자신들보다 4배나 많은 오스만 대군과 맞선 전투였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려는 목표 아래 두 기독교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이라는 더 큰 맥락 속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인해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게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10만 대군, 소수 연합군을 압박하다

1789년 9월,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하산 파샤는 수천 명의 예니체리를 포함한 10만 명의 병력을 규합하고, 코부르크와 수보로프라는 뛰어난 장군들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1만 8,000명)과 러시아군(7,000명)의 소규모 연합군을 향해 진격해 왔다.

오스만 재상은 자신의 병력이 5대 1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부터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수보로프는 터키 측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자신이 거느린 불과 7,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동맹군 지원에 나섰다. 100km의 강행군 끝에 러시아군은 전투 전날 밤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공격, 또 공격… 총검이 곧 생명이다

수보로프는 공격주의 교리의 신봉자로, 화망보다 총검을 선호하는 장군이었다.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 눌려 완전히 분쇄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는 네 배나 많은 터키군에게 선제 기습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연합군은 두 개의 대형 공격 종대를 편성하고 세레트 강의 지류인 리므니크 강을 건넌 뒤 공격에 나섰다. 신속하게 진격한 연합군은 터키 포병 진지에 도달해, 그들이 포문을 열기도 전에 진지를 유린해 버렸다.

하산 파샤는 방대한 기병대를 전장에 투입하며 맞섰다. 그러나 연합군 보병은 즉시 방진(스퀘어) 대형을 형성해 살인적인 일제 사격으로 터키 기병을 흩어버렸다. 수천 구의 터키 시체가 들판에 널리기 시작하자, 수보로프와 코부르크는 총공격을 명령했다.

깃발 앞세운 총검 돌격

총검을 장착한 연합군 보병은 기병대의 엄호 아래, 아침 햇살에 펄럭이는 군기를 앞세우고 터키 진영으로 돌진했다. 첫 번째 소규모 터키 진영을 공략한 연합군은 적을 완전히 패주시켰다.

오후 3시경 연합군은 보그사 마을의 터키 수비대를 격퇴했고, 같은 대형을 유지한 채 주력 터키 진영을 향해 공격을 이어갔다. 터키군은 예니체리 부대를 파도처럼 몰아가며 오스트리아·러시아 보병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그동안 수보로프는 '마지막 일격'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강가에서 벌어진 학살

예니체리가 연합군 보병과 교전 중 묶여 있는 사이, 연합군 기병이 그들의 측면으로 돌진해 문자 그대로 대열을 찢어버렸다. 경악한 터키군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고, 연합군 보병은 즉시 추격에 나섰다.

터키군은 등 뒤에 강을 낸 채 갇혀 학살당했다. 강을 건너려던 수많은 병사들이 익사했다. 터키군의 손실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2만 명이 넘는 병사가 학살당하거나 강물에 빠져 죽었다. 반면 두 기독교 동맹국의 손실은 단 700명에 불과했다.

패배한 하산 파샤는 대재상 직위를 잃었으나 목숨만은 건졌다. 리므니크 전투의 결과로 터키군은 다뉴브 강 유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