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방문, 그리고 저무는 방어선
1942년 2월 10일, 웨이벌(Archibald Wavell) 장군은 싱가포르섬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뒤, 저녁 자바로 돌아가는 길에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에게 보고를 전했다. "싱가포르 전투는 극히 어렵다… 병력의 사기는 상당히 저조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복을 일절 배제하고 부대가 끝까지 싸울 것을 요구하는 정식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나 항복이라는 생각은 이미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2월 13일, 영국군은 도시를 감싸는 길이 45킬로미터에 불과한 좁은 포위선 안으로 몰려 들었다. 역습은커녕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형편이었고, 병사들은 더 이상 지휘관을 신뢰하지 않았다. 탈영병들의 행렬이 도시 곳곳에 넘쳐나, 그들은 지하실에 몸을 숨긴 채 밤이 되면 가게와 가옥을 약탈하러 나섰다. 도시 전역은 피난민으로 붐비았고, 부킷티마(Bukit Timah) 지역의 상실로 식량 비축분은 일주일치밖에 남지 않았다. 설상가상, 일본군의 포격으로 저수지와 상수도 시설이 파손되어 수리할 가망마저 희박했다.
"반드시 버텨내야 한다"
그럼에도 퍼시벌(Arthur Percival) 장군은 상황을 절망적인 것으로 규정하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13일 오후 열린 회의에서 그는 저항을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웨이벌에게 보낸 메시지 속에서 그는 스스로 이틀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인정했고,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도록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웨이벌의 답신은 냉철했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야 한다. 시가전을 통해서라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지연 작전은 다른 전역에서 결정적인 무게를 가질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반드시 버텨내야 한다."
문제는 시가전이 원칙적으로 민간인 대피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전투 방식이라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싱가포르의 주민들은 피난처 없이 그대로 제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야마시타의 허세, 영국군의 선택
사실 공격자인 야마시타(Tomoyuki Yamashita) 중장 역시 극한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휘하 지휘관들은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갔다고 보고했고, 과부하에 걸린 보급 체계는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전투가 사흘만 더 이어진다면 그 역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 분명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공세를 한층 강화하는 것, 즉 마치 탄약이 무진장 남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허세로 영국군을 항복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이 기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2월 15일 오전 11시, 부킷티마로 통하는 도로변에 배치된 일본군 제18사단 소속 초병이 보고했다. 눈앞 나무들 사이에서 하얀 깃발이 올라오고 있다고. 장교가 직접 확인하러 나섰고, 초병의 진술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쌍안경 너머로 그는 무전 건물 위에도 또 하나의 하얀 깃발이 게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같은 깃발을 단 차량 한 대가 도시에서 나왔고, 스기타(Ichiji Sugita) 중령이 마중 나가 그 차를 맞이했다. 도로변에서 짧게 진행된 회담에서 영국측 대표단은 항복 조건을 논의하러 왔다고 밝혔고, 일행은 곧 일본군 진영 안으로 안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