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할힌골 전투 1939: 일본군의 전략과 주코프의 반격

일본군의 포위 작전 계획

7월 초, 일본군은 할하강(할힌골) 동쪽 국경 지대에 병력 3만 8천 명, 전차 135대, 항공기 225대를 집결시켰다. 이에 맞선 소련-몽골 연합군은 겨우 1만 2천500명에 불과했지만, 주코프는 당대 최고 성능의 전차 186대와 장갑차 226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이 전력이 절실히 필요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의 계획은 대규모 부대를 투입해 소련군 좌익을 포위하고 강을 도하한 뒤, 전역의 최고 지점인 바인차간(Bain-Tsagan)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즉, 주력 부대가 전차를 앞세워 정면 공격을 가하는 동안 기동 익이 적의 후방으로 우회하여 동안(東岸)의 돌출부를 섬멸한다는 구상이었다.

작전 일정상 일본군은 공세 단계를 7월 중순까지 종결하고, 가을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캠페인 전체를 마무리하려 했다. 7월 2일, 일본군은 하류 동안의 비교적 취약한 방어 진지에 대한 공격으로 적개행동을 개시했다. 하루가 저물기 무렵, 일본군 전차와 보병은 소련 제3방어선 내부의 여러 지점에서 강변에 도달했다. 그러나 주코프는 예비대를 성급하게 투입하지 않을 만큼 신중하고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바인차간의 위기와 주코프의 결단

7월 3일 새벽, 몽골군 고문단장 아포닌(Afonin) 대령은 바인차간에서 몽골 제6기병사단을 시찰하던 중 포교(浮橋)를 통해 강을 건너온 일본군과 불시에 조우했다. 소련식 교육과 장비가 부족했던 몽골 병사들은 순식간에 밀려나고 말았다.

다음 날 해가 뜰 무렵, 주코프는 상황의 위험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일본군이 남쪽으로 돌진하면 격전 끝에 지쳐 있던 소련군이 보급 기지로부터 차단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예비대였던 기갑 부대들을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북쪽에서 공격하는 임무를 맡은 제11전차여단, 남쪽에서 진격하는 제7기계화여단, 그리고 혼란에 빠진 몽골 부대 사이로 북서쪽에서 돌파하는 제24차량화보병연대가 그것이었다. 이들 기갑 부대는 모두 300대가 넘는 전투 차량을 보유한 반면, 강 양안의 일본군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더 이상 반격을 늦출 수 없었다고 밝혔다. 적이 이미 진격하는 전차를 목격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서둘러 방어 태세를 갖추고 활짝 열린 평지를 달리는 차량 행렬에 항공 공격을 가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 수 킬로미터에 걸쳐 시야를 가릴 만한 덤불 하나 없는 황량한 지형이었다.

소련군의 반격, 일본군의 참패

소련군의 신속한 기동은 일본군을 경악시켰고, 이윽고 사기를 꺾어버렸다. 오전 7시까지 주코프가 운용 가능한 모든 폭격기가 폭탄 세례를 시작했고, 천황의 병사들은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편제된 소련 중포병의 위력을 실감했다. 오전 9시부터 소련 기갑부대의 선두 부대가 전장에 도착했고, 총공격은 오전 10시 45분에 개시되었다. 시간이 부족했던 일본군은 깊은 참호와 진지를 구축하지 못했으며, 대전차 전투 훈련 역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해 질 녘이면 포위 위기에 처한 것은 더 이상 소련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 소련군의 포격과 공습에 더해, 결정적으로 할하강의 포교가 파괴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강을 헤엄쳐 되돌아가려던 일본군 가운데 수백 명이 익사했다. 코마츠바라(小松原) 사단장은 참모진과 함께 철수할 수 있었지만, 바인차간을 공격했던 병사 대부분은 언덕 비탈에서 죽거나 다친 채 쓰러져 있었다.

7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끝날 무렵, 일본군은 만주에 보유한 전차의 절반을 잃었다. 7월 3일 하루 동안 소련군도 백여 대의 전차를 손실했지만, 붉은 군대는 야포와 대전차 화력 면에서 일본군이 드러낸 뚜렷한 취약점을 성공적으로 활용했다.

관동군의 재도전

그러나 관동군은 몽골에서의 모험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7월 말까지 관동군은 해당 지역의 병력을 두 배로 늘렸고, 할하강 방어선 강화를 위해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여러 사단의 대전차 부대를 차출했다. 8월 10일에는 오기스 리포(荻州立兵) 중장의 지휘 아래 일본군 제6군이 창설되었다. 병력 7만 5천 명 규모의 이 부대는 완편된 제7·제23 보병사단, 만주국 여단, 기병연대 3개, 전차 182대, 장갑차 300대, 포병연대 3개로 구성되었고, 450대가 넘는 항공기의 지원을 받았다. 7월 23일에 감행한 공격이 소련군의 폭격으로 즉각 저지된 실패 이후, 8월 24일 정면 70킬로미터에 걸친 전선에서 총력전이자 최후의 공세가 계획되었다. 한편 소련 진영에서 승패는 아직 불확실했다.

스탈린의 승부수와 보급의 몰락

강력한 증원 부대들은 러시아 본토와 전선을 잇는 열악한 수송망을 거쳐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국가의 국제적 위신이 걸려 있다고 판단했고, 약자에게 관대하지 않은 히틀러와의 새로운 협상이 중요한 국면에 이르렀다고 여겼다. 이제 피도 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우리의 손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라고 한 전직 붉은 군대 장교는 회고했다.

7월과 8월 내내 소련군은 보병사단 3개, 기병사단 2개, 독립여단 7개(그중 5개는 기갑여단)를 집결시켰고, 여기에 포병 및 항공 부대가 추가되었다. 이는 결코 만만치 않은 위업이었다. 이미 전년도에 일본군은 국경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철도를 완공해 놓은 상태였다. 반면 새로 창설된 소련 제1집단군의 보급 기지가 될 철도 종착역은 65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주코프의 차기 공세를 위해서는 몽골의 조악한 도로를 따라 군수품 5만 5천 톤, 그중 포병 탄약만 1만 8천 톤을 수송해야 했다.

트럭들은 한계에 다다랐고, 과로에 시달린 운전병들은 늦여름의 혹독한 더위와 중앙아시아의 모래폭풍에 지쳐 있었다. 트럭 부족이 너무 심각하여 때로는 포병 견인차까지 물자 수송에 동원되어야 했다.

주코프의 계획과 기습을 위한 위장 작전

주코프에게는 이미 계획이 있었다. 일본군이 대규모 포위 기동을 시도했으니, 이번에는 그들에게 전술의 한 수업을 선물할 차례였다. 그는 새로운 병력을 북·남·중앙의 세 개 집단으로 재편성하고, 양익에 신속하게 투입 가능한 기갑 부대를 배치했다. 공세 준비는 8월 20일, 즉 적보다 나흘 앞서 완료될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주코프는 계획과 부대 이동을 철저히 은폐했다. 그는 기발한 위장술을 통해 기습 요소를 유지했다. 대량의 토목 장비 발주를 지시하는 가짜 무전 메시지를 흘려 일본군으로 하여금 러시아군이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가을을 넘길 생각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말뚝 박는 듯한 소리 효과까지 연출해 대규모 진지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대규모 기갑 및 차량화 부대의 이동은 오직 밤에만 이루어졌으며, 그 소음은 항공 폭격과 포격으로 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