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939년 할힌골 전투: 주코프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다

두 개의 전선, 모스크바를 짓누른 불안

당시 모스크바에는 깊은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도쿄에서 활동하던 소련의 첩보 마스터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의 장기 계획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계속 보내오고 있었지만, 스탈린은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 즉 양면 전쟁의 공포를 현실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모험주의가 바이칼호 너머 시베리아 전역으로 번지기 전에 미연에 차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습니다.

스탈린은 두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첫째, 소련 내지의 병력을 이 작전에 투입한다. 둘째, 신뢰를 주고 야망 있는 일류 지휘관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한다. 스탈린의 선택은 당시 군단장급 장성이던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에게 돌아갔습니다.

43세의 강경파 사령관, 주코프

1939년 주코프는 43세로, 엄격하고 강경한 성격으로 이름난 인물이었습니다. 기병 출신에서 기갑 부대로 전환한 그는 러시아 방위의 핵심인 벨라루스 군관구의 부사령관을 맡고 있었습니다. 다부진 체격에 짙은 눈썹의 인상적인 외모를 지닌 그는 강단 있는 리더십으로 커리어를 쌓아온 인물이었습니다(그의 이름 어근 '주크'는 '상대를 제압하는 자', 즉 강타자를 뜻합니다). 혁명 당시 말단 병사로 군에 입대한 그는 평시에 맡은 지휘관직마다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중국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고 아마도 스페인에서도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피비린내 나던 1937년 대숙청의 소용돌이도 살아남았습니다. 붉은군대는 이미 그의 까다로운 성미와 타협하지 않는 명석한 판단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패배 없는 장군'의 운명이 걸린 시험대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장군"이라는 평가와 함께 주코프는 이후 특별히 중대한 임무들을 연달아 맡게 됩니다. 독소전쟁에서 병력과 작전의 총지휘를 담당한 그는 1941년에는 모스크바 성문 앞에서 히틀러의 공세를 저지했고, 1942년에는 스탈린그라드에서, 1945년에는 베를린의 폐허 속에서 연합군과 회합하며 서방 세계에 소련 전쟁 기계의 압도적인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1939년 6월 어느 날, 소수의 참모진과 함께 외몽골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던 주코프의 미래, 아니 어쩌면 목숨 자체가 할힌골의 승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완전한 섬멸만이 스탈린을 만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장의 절박한 실정, 그리고 단호한 결단

주코프는 6월 5일, 이 지역에 주둔하던 유일한 소련 주력 부대인 제57특수군단 사령부에 도착했습니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습니다. 사령부는 최전선과 동떨어져 고립된 느낌이었고, 전 구역에 전신선 한 킬로미터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아 부대 간 조율이 심각하게 부실했습니다. 열악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정찰 결과는 일본군이 단순한 국경 분쟁 수준을 훨쩍 넘는 규모의 준비를 진행 중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제공권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정찰 비행을 하며 폭격까지 감행하고 있었습니다.

필요할 때에만 사용하라는 지시가 적힌 총사령관 임명장을 품고 도착한 주코프는 즉시 사태를 자신의 손에 쥐었습니다. 기존 군단장은 물러났고, 새 사령관은 그의 특유의 불굴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방어 체계 재정비에 착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