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크모나이 포위와 케르치 함락
스타프카(소련 최고사령부)는 크림 전선 사령부에 병력을 튀르키 방벽(Turkish Rampart) 선까지 철수시켜 그곳에 안정된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5월 11일 아크모나이(Ak-Monai) 인근에서 전선 병력 일부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고, 5월 15일에는 케르치 시를 점령했다.
이 시기 독일 공군은 하루 약 1,800소티를 출격시키며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케르치 해협을 건너는 필사적인 철수
소련 최고사령부로서는 크림 전선 병력을 케르치 반도에서 철수시키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에 따라 5월 15일부터 20일까지 극도로 열악한 조건 속에서 부대들은 케르치 해협을 건너 타만 반도와 추슈카 곶으로 이동했다. 적은 탑승 지점과 상륙 지점, 그리고 해협 도하 과정 자체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기간 8만 6천 명 이상이 철수에 성공했으며, 그중 2만 3천 명은 부상자였다. 그러나 일부 부대와 편제는 타만 반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케르치에 고립되었다. 이들은 케르치의 석회암 채석장에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침략자에게 끝까지 영웅적으로 맞서 싸웠다.
크림 전선 붕괴의 참상
1942년 봄 크림 전선의 붕괴는 극히 심각한 것이었다. 5월 한 달 동안 이 전선은 17만 6천 명의 병력을 잃었고, 수많은 붉은 군대 부대 지휘관들이 케르치 반도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장비와 중무기 거의 대부분을 노획했으며, 이후 세바스토폴의 영웅적인 방어자들을 상대로 그 무기를 되돌려 사용했다.
실패의 근본 원인
크림 전선 실패의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 전선 사령부와 스타프카 대표(군 정치위원 멕흘리스)가 먼저 독일군에 대한 방어를, 그다음에는 반도 철수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데 있었다. 전선 사령부의 무능으로 인해 군단 간 협동은 물론 육군과 공군 간의 협조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공군은 분산된 채 작전 전반의 계획과 무관하게 행동했다.
전선 사령관, 참모부, 스타프카 대표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부대의 실제 상태조차 모른 채 명령을 내렸고, 그마저도 너무 늦게 하달했다. 또한 부대와 직접 접촉하지 않았으며, 방어 작전의 결정적 나날 동안 단순히 신속하고 정확한 작전 지휘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시간이 전선 군사평의회의 수많고 무의미한 회의에 허비되었다.
멕흘리스의 책임과 처벌
케르치 반도 재앙의 주범은 단연 멕흘리스였다. 그는 스타프카 대표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고, 크림 전선 병력을 튀르키 방벽으로 제때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경솔하게도 전선 사령관의 직권을 침범해 그를 대체했으며, 실제 상황을 감안하지 않은 채 여러 부대에 임무를 부여했다.
결국 스타프카는 멕흘리스를 국방인민위원부 차관 겸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 직에서 해임했다. 전선 사령관과 그의 '군사평의회 대리' 역시 파면되고 강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