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영국 본토 항공전 – 루프트바페의 좌절과 독일 무적 신화의 해체

1940년 9월, 영국 상공에서 벌어진 항공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를 결정적 국면에 들어섰다. 4일간의 일시 정전 동안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참모본부는 작전 계획을 재검토했고, 8월 24일 공세가 재개되어 9월 7일까지 이어졌다. 독일 폭격기들은 이제 켄트·서식스·서리 주의 비행장 등 핵심 목표물에 공격을 집중했다.

전투기 사령부, 존폐의 기로에 서다

영국 전투기 사령부(Fighter Command)는 개전 이래 가장 치열한 시기를 맞았다. 지칠대로 지친 조종사들이 출격했고, 정비사들은 폭격으로 초토화된 격납고와 활주로에서 밤낮없이 기체를 손보았다. 하루 평균 37대의 독일기가 격추된 반면 영국 전투기의 손실은 20대에 그쳤다. 더 중요한 차이는 낙하산으로 탈출한 영국 조종사는 다시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기체와 함께 격추된 독일 조종사는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루프트바페에서 영구히 이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전투기 사령부는 이미 한계 직전이었다. 기지와 비행장은 파괴되었고, 극심한 긴장에 시달린 조종사들은 사실상 하루 24시간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손실된 승무원은 보충되지 않았다. 9월 6일,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국 왕립공군(RAF)은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히틀러가 루프트바페의 공격 목표를 변경하면서 RAF는 재앙에서 벗어나게 된다.

목표 변경의 배경 – 런던 폭격 결정

런던과 잉글랜드 남부 주요 도시에 대한 폭격 결정은 베를린에 대한 영국군의 보복 공습 이후 내려졌다. 독일 편대가 런던 부두를 우발적으로 폭격하자 처칠은 이에 대한 응징으로 베를린 공습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민간인에 대한 공포 심리를 통해 영국의 저항을 꺾으려는 구상은 루프트바페가 처음부터 검토해 온 것이었고, 괴링 역시 영국 본토 항공전 초기부터 이를 건의했다. 그 근거는 몇 달 전 폴란드와 서유럽에서 거둔 성과였다. 히틀러는 영국과의 타협 가능성을 모두 잃은 뒤에야 이 방안에 동조했다.

블리츠의 시작과 결정적인 일주일

9월 7일, 런던 대공습(블리츠)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400대의 폭격기가, 밤에는 250대의 항공기가 런던을 덮쳤다. 이후 루프트바페는 약 일주일간 공격을 멈췄고, 전투기 사령부는 이 귀중한 시간을 활용해 크게 줄어든 비행대대를 재편성했다. 9월 12일에는 영국 폭격기 사령부(Bomber Command)가 안트베르펜, 오스텐더, 됭케르크, 칼레, 르아브르 항구에 집결한 독일 침공 선단을 공격해 일부를 파괴했다.

9월 14일 블리츠가 재개될 무렵, 독일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주일을 잃었지만 승리는 아직 손에 닿을 거리에 있었고, RAF가 얻은 것은 짧은 숨통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뜻밖의 유예 기간 덕분에 영국군은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9월 15일, 수백 대의 폭격기로 구성된 독일 편대는 300대의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의 요격을 받았다. 영국 전투기들은 독일 편대를 분산시키고 루프트바페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전투는 16일까지 이어졌지만, 이제 독일이 가까운 시일 내에 — 설령 언젠가는 손에 넣을지라도 — 영국 해협과 잉글랜드 남부의 제공권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바다사자 작전 무기한 연기 – 히틀러의 첫 번째 좌절

9월 17일, 원래 영국 상륙 작전(바다사자 작전) 개시 예정일이던 이날, 히틀러는 침공 선단의 분산을 명령하고 영국 본토 공격을 무기한 연기했다. 형식상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는 1941년 봄까지 준비를 마치기로 되어 있었지만, 현실에서 히틀러는 영국 상륙 자체를 포기했고 이 계획은 다시는 추진되지 않았다.

이것은 1933년 이래 히틀러가 겪은 첫 번째 좌절이자, 전쟁 발발 이후 독일 국방군이 처음 당한 실패였다. 오류를 거듭하다 끝내 RAF를 섬멸할 기회마저 놓친 독일은, 오히려 전투기 사령부에게 첫 번째 대승리를 안겨주었다. 다만 모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영국 도시들에 대한 주야간 폭격이 계속되는 한 전세가 독일 쪽으로 기울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10월 31일까지 상황은 여전히 절박했지만, 11월 이후 — 1940~41년 겨울 내내 공습 강도가 높아지는 가운데 — 영국은 마침내 영국 본토 항공전의 승자로 자리매김했다.

80일 항공전의 결과와 교훈

약 80일간의 공중전에서 루프트바페는 2,265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전투기 사령부의 손실은 945대의 전투기였다. 폭격으로 민간인 1만 5천 명이 목숨을 잃고 2만 명이 다쳤으며 물질적 피해 또한 막대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설정한 목표는 하나도 달성되지 못했다.

블리츠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은 공포에 질리거나 사기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군사 지도층의 뒤에서 하나로 결속했고, 시련은 승리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반면 전쟁 전 일부 전략가들이 '막을 수 없는 절대 병기'로 여기던 폭격기는 생각보다 극도로 취약하고 효과도 의문스러운 무기임이 드러났다. 주간 폭격기는 전투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야간 폭격기는 전파 빔 기반의 복잡한 유도 장치에 의존해야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영국군은 전자 교전이라는 대응책으로 이를 무력화하거나 빗나가게 만들었다.

결국 독일 전투기와 맞서 제공권을 다투며 목숨을 바친 전투기 사령부 조종사들의 영웅적이고 필사적인 사투가 영국 — 나아가 아마도 전 세계 — 을 되돌릴 수 없는 재앙에서 구해냈다. 윈스턴 처칠은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이토록 적은 사람이 이토록 많은 사람의 운명을 쥐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