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드래군 작전: 프로방스 해안 상륙의 전투 기록

드래군 작전: 프로방스 해안 상륙의 전투 기록

해안 정화 작전: 아펙스 무인정과 로켓 세례

소음 발생 장치를 장착한 소형 무인정 '아펙스(Apex)'들이 떼지어 해변으로 몰려가, 이미 해안 인근 수로의 기뢰와 장애물을 제거한 준설선들의 작업을 마무리했다. 각각 10톤의 폭약을 실은 아펙스들은 해안 바로 앞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장애물과 기뢰를 폭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어 해안에서 약 1.6km 떨어진 해상에 닻을 내린 개조형 전차상륙함(LCT) 40척에서 3만 발의 '후푸스(Whoofus)' 로켓이 발사되었다. 이 로켓들은 모래 속에 묻힌 기뢰를 폭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전 8시, 최초의 공격 부대가 보병상륙정(LCI) 150척에서 해변으로 쏟아져 나올 때도 로켓들은 아직 병사들의 머리 위를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날 하루 9만 명의 병력이 상륙할 예정이었고, 이들이 바로 그 선봉대였다.

알파 루즈 해안: 침묵 뒤에 숨겨진 함성

알파 루즈(Alpha Rouge) 구역(카발레르쉬르메르)에서는 미군 제7연대(제3사단)의 돌격 부대가 온통 장애물로 덮인 해변에 물을 가르며 진입했다. 8분간 퍼부은 후푸스 로켓 포격은 불발이 많았고, 해변의 절반은 여전히 서 있는 말뚝들, 철조망의 정글, 그리고 얼마나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매설 기뢰들로 뒤덮여 있었다. 미군은 이제 이것들을 직접 헤쳐 나가야 했다.

유린당한 해변은 텅 빈 듯 보였고, 20분 동안 완전한 침묵이 흘렀다. 해안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참호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공병들이 방갈로어(Bangalore) 폭발관으로 진로를 뚫기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 고지대에서 독일군의 박격포, 88mm 포, 기관총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해변 위쪽을 따라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아무런 엄폐물 없이 노출된 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나무와 수풀 뒤로 몸을 숨기려던 병사들은 매설된 기뢰에 목숨을 잃었다.

알파 루즈에서 제30사단은 모두 203명의 손실을 입었는데, 이는 상륙 부대 중 가장 큰 희생이었다. 그러나 악랄하고 치명적이었던 독일군의 반격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한 시간 안에 알파 루즈는 미군의 손에 들어왔다. 해변을 뚫고 소나무 숲을 가르며 싸워 올라온 돌격 부대와 전차들이 해안 도로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알파 존: 단 40분 만의 점령

그로부터 20km 떨어진 알파 존(Alpha Jaune) 구역(팡플론느)에서는 미군의 성공이 훨씬 빨랐다. 독일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의욕 없는 포격에 그쳤다. 단 40분 만에 제15연대(제3사단)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팡플론느를 점령했다. 제756전차대대와 제601대전차대대와 함께 해변 뒤편의 수풀을 통과하며, 이들은 생트로페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따라 꾸준히 전진을 계속했다.

델타 구역: 예정보다 빠른 라 나르텔 점령

알파 구역 해변들이 비교적 쉽고 빠르게 정복된 것은 드래군(Dragoon) 작전 상륙 전반의 특징이었다. 생트막심 근처 델타 구역의 라 나르텔(La Nartelle)은 예정보다 몇 분 앞서 점령되었다. 물론 미군 제157연대(제45사단)는 해변을 따라 이어진 높이 3m, 두께 2m의 거대한 벽이라는 강력한 장애물과 마주쳤다. 모든 포격을 견뎌낸 이 벽이었지만, 파괴 중대가 'S' 지뢰로 폭파하여 길을 열었다. 폭 5m의 구멍이 뚫리자, 전차·지프·장갑차의 지원을 받은 제157연대 병사들은 정원과 포도밭을 가르며 뒤편의 도로까지 진격했다. 알파 루즈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저항은 격렬했으나 짧았다.

생트막심 함락과 독일군의 사기 저하

오전 9시 15분경 제157연대는 생트막심(Sainte-Maxime)에 진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일군 대부분은 이미 떠난 뒤였다. 중장비 트럭과 장갑차를 끌고 약 500명의 병력이 오전 8시까지 철수했고, 소수의 저격수만 남아 있었다. 오전 중반, 2시간에 걸친 시가전 끝에 이 마지막 잔류 병력도 침묵했고, 생트막심은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연합군이 라 나르텔에 상륙하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도시를 떠난 독일군의 행보는, 제19군 전체를 짓누른 좌절감을 잘 보여주었다. 이러한 불안은 최고 지휘부에까지 번져 있었다. 어떤 고위 장교도 연합군의 해상 침공을 막을 수 있다고, 하물며 격퇴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히틀러의 조기 철수 결정

8월 15일 정오 무렵, 연합군은 강력한 교두보를 확립했고 제45사단은 르뮈(Le Muy) 일대의 공수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내륙으로 질주했다. 공수부대는 이미 생트막심과 생트라파엘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여, 독일군이 이 지역에 증원을 보낼 희망 자체를 없애 버린 상태였다. 히틀러는 제11기갑사단 출동 명령을 8월 13일까지 불필요하게 늦추었다. 그 결과 이 사단은 여전히 160km 떨어진 아비뇽에 머물러 있었고, 연합군 공군의 집중 공습 아래 매 한 뼘의 땅을 사수하며 싸우고 있었다.

프로방스에서 전해지는 참담한 소식은, 동프로이센 라슈텐부르크의 총사령부에서 요들(Alfred Jodl) 대장이 히틀러에게 보고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제19군을 구할 유일한 방법은 즉각적인 철수뿐이라는 확신을 히틀러에게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히틀러의 핵심 전략 참모였던 요들은 이미 프랑스 철수 계획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오후 12시 45분, 히틀러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를 승인했다. 그는 항구를 봉쇄하고, 선박을 자침시키며, 무기와 연료를 파괴하고, 보급 물자를 강력하게 요새화된 마르세유와 툴롱 항구 쪽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두 항구는 계속 점령을 유지하기로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