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벨베데레 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라

1944년 1월 말, 이탈리아 전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방면. 프랑스 원정군단 소속 제3 알제리 보병사단은 벨베데레(Belvedere) 고지를 두고 독일군과 사활을 건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다음은 당시의 처절한 전황과, 프랑스군 지휘관이 미 제5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이다.

버티기로 결심한 지휘관들

벨베데레 고지를 끝까지 붙잡고 있던 간도에(Gandoët) 대령의 고뇌는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좌우 어느 쪽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케(Bacqué) 대령과 상의했고, 두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기로 결심한다. 바케 대대가 베른(Berne) 대대를 교체해 전선에 들어섰고, 간도에는 862 고지를 돌파하던 조르디(Jordy) 부대에게 계단식으로 물러나 682 고지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공격으로써 방어하라

이윽고 우리 포병은 O2 지점을 향해 맹렬한 응사를 시작했다. 계곡의 올리벨라(Olivella) 일대에서는 상황이 다소 호전되어 보였다. 제3 티라이유르(저격병) 연대와 제7 연대 소속 중대들이 그곳의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제4 튀니지 티라이유르 연대의 잔존 병력은 벨베데레와 아바테(Abate) 고개 기슭에서 포위 압박을 이어갔다. 밤이 되면 보급품이 보내질 예정이었다.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의 무게와 전투에서 지켜야 할 상호 연대 의식을 깊이 자각한 몽사베르(Monsabert) 장군은, 이제부터는 공격으로써 방어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동시에 그는 다른 연대들의 투입을 서둘러 지시했다. 이미 제3 저격연대의 로키니(Rocquigny) 대대는 간도의 구원을 위해 분전 중이었고, 바케의 지휘 아래 들어온 제7 저격연대의 페포네(Péponnet) 대대 역시 전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700 고지의 호조와 좌익의 고전

700 고지 일대에서는 보급과 증원 덕분에 사정이 나아졌다. 고통스러운 이틀 밤이 지나간 뒤, 제11 중대는 제3 저격연대 한 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이름 없는 능선과 862 고지 능선에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좌익의 상황은 달랐다. 티시에(Tixier)의 제7 중대, 제7 알제리 저격대의 페포네 대대, 그리고 제4 R.T.T.(튀니지 저격연대) 제1대대의 카레(Carré)·라르티고(Lartigau) 대위는 여전히 격렬한 독일군의 역습에 시달리며 771과 721 고지의 비탈을 붙잡는 데만 그칠 수밖에 없었다.

몽사베르 장군은 부하들에게 1월 30일 아침 공격 재개를 간곡히 요청했다. 미 제2군단이 마침내 평야로 돌파하려 하고 있었고, 그 결과 O2(915 고지) 재탈환이 시도될 것이므로, 이를 받쳐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클라크 장군에 보낸 분노의 서한

29일 저녁, 나는 클라크(Clark) 장군에게 직접 서한을 써 보냈다. 놀라운 노력과 큰 대가를 치르고 맡겨진 임무를 완수한 제3 알제리 보병사단(D.I.A.)을 두고 보면서도, 정작 미 제34 보병사단은 아직 카이로(Cairo) 마을 남서쪽 고지에 발판조차 마련하지 못한 모습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내일 미 제34사단이 오늘 오후 말미에 나에게 전해진 정보가 시사하듯 적진을 파고들어 목표를 점령한다면, 제3 D.I.A.의 상황은 상당히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제34사단이 현 위치에 머문다면, 나는 가능한 한 조속히 제3 D.I.A.를 아티나-산엘리아(Atina-San Elia) 도로 동쪽으로 철수시켜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지난 나흘 동안 보여준 것보다 더 큰 노력을 알제리 사단에 요구할 수 없으며, 벨베데레에 고립된 채 방치될 위험 또한 감수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는 벨베데레에서 방어전을 치를 만한 예비대가 없다. 이 고지는 적의 화망에 지배당하고 포위된 처지라 방어전은 분명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며, 카이로-테렐레(Cairo-Terelle) 도로를 사용할 수 없는 한 보급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서한은 단순한 전황 보고를 넘어, 연합군 내부에서 감당해야 할 부담이 한쪽에만 쏠린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이기도 했다. 산악의 추위와 적의 화망 속에서 벨베데레를 사수한 병사들의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으려면, 전선 전체의 균형 잡힌 협공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호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