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모든 나라에서 오세요: 스페인 내전과 국제 의용병들의 결집

모든 나라에서 오세요: 스페인 내전과 국제 의용병들의 결집

거리로 넘어간 실권, 무장한 인민들

정부가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인민에게 무기를 쥐여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실권은 거리로, 즉 각종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중앙 조직들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들은 위험에 직면해서도 내분을 접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공화국에 충성을 지킨 세력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돌격경비대 몇 개 부대, 다수의 공군 장병(하지만 스페인 공군은 빈약했다), 그리고 일부 전차 승무원들뿐이었다. 극우 보수 성향이던 해군 장교단은 반란군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으리라. 여러 함정의 선원들이 폭력을 동원해까지 이를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정당과 노조별 인민 민병대

정규군의 이런 잔존 세력 외에 정부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민 민병대뿐이었다. 정당과 노조마다 자기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과 그 노동조합 연합체인 CNT(전국노동자연맹), 공산당, 사회당, 트로츠키스트 계열의 POUM(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 카탈루냐의 PSUC(카탈루냐통일사회당), 그리고 UGT(노동자총연맹) 소속 노조원들. 곳곳에는 UHP(프롤레타리아 통일·우애)라는 명칭 아래 통합 민병대도 조직되어 있었다.

용기는 넘치지만 군사 훈련은 전혀 받지 못한 이들은 소속 진영에 따라 추구할 노선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럼에도 이들—이것만 해도 이미 기적이다—은 여러 지역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코군의 진격을 오랫동안 막아내지는 못했다. 공화국은 적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는 가운데 국가와 군대를 동시에 재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인 의용병들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자유와 정의' 부대와 로셀리 형제의 최후

8월 중순, 최초의 외국인 센투리아(백인대)가 창설되었다. 이탈리아인들로 구성된 이 부대는 프랑스로 피신한 두 반파시스트 망명자, 카를로 로셀리와 넬로 로셀리 형제가 조직한 것이었다. 부대 이름은 형제들이 망명지에서 세운 운동의 이름을 따 '자유와 정의(Giustizia e Libertà)'라 불렸다. 아라곤 전선에 투입된 이 부대는 몬테 펠라도 전투에서 프랑코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로셀리 형제는 요양차 프랑스로 건너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뇰드레른(Bagnoles-de-l'Orne)에서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철의 규율, 탈먼 부대의 등장

독일인들 역시 또 하나의 센투리아를 조직했다. 지휘를 맡은 것은 공산당 의원 출신 한스 바임러(Hans Beimler). 그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SS 대원을 목졸라 죽인 뒤 탈출한 인물이었다. 부대는 당시 독일 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탈먼(Ernst Thälmann)의 이름을 딴 '탈먼 부대'로 명명되었다.

정렬하여 종종걸음으로 행진하고 철의 규율을 지키며 모습을 드러낸 독일인 의용병들의 도착은, 소란스럽고 무질서하던 민병대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윽고 프랑스인, 벨기에인, 헝가리인들도 이 부대에 합류했으며, 이들은 이후 치열한 전투에서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

이룬 방어전과 서구 열강의 비개입

8월 18일, 이탈리아 전폭기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군의 공격을 받은 이룬(Irun)에서도 또 하나의 외국인 센투리아가 도시 방어에 나섰다.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벨기에인, 체코인, 유고슬라비아인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프랑스 예비역 대위 자크 마나켐(Jacques Manachem)이 지휘했다. 그러나 바로 눈앞인 프랑스 국경에서는 무기를 실은 화물 열차들이 발목을 잡혀 있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방금 비개입을 결정한 참이었다. 스스로를 '모든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 여긴 의용병들의 싸움은, 이렇게 고립된 가운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