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마드리드를 사수하다: 예상치 못한 저항과 국제여단의 등장

마드리드를 사수하다: 예상치 못한 저항과 국제여단의 등장

예상을 깬 격렬한 저항

국민파(프랑코파) 포병대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공화파 포대 대부분을 침묵시켰다. 그러나 계획대로 진격을 개시한 국민파 부대는 전혀 예상 밖의 저항에 부딪혔고, 소련제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은 공화군의 조직적인 역공까지 맞서야 했다. 진격은 느려지더니 결국 멈추고 말았다.

바렐라(Varela) 장군은 분노했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고,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양측은 보기 드물게 처절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총검을 장착한 채 손실 따위 아량하지 않고 돌격한 모로코 타보르(부대)는 최후의 일인까지 궤멸당했고, 공화파 측에서는 여성으로 구성된 대대가 생사가 걸린 다리를 끝까지 사수했다. 아이들은 무너진 바리케이드 재건을 도왔고, 전사자들의 시신은 방벽을 보강하는 데까지 동원되었다. 마지막 탄약을 쏘고 있다는 신호가 오면,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증원이 도착할 때까지 24시간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버티겠다는 것이었다.

부활한 희망

11월 7일 자정 무렵, 국민파 부대는 마드리드 중심부 깊숙이 침투해 있었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지 못했고 방어선은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마드리드에 새로운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거의 꺼져 가던 희망이, 모든 논리를 거스르고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여단의 도착

11월 8일 일요일 정오 무렵, 마드리드 거리에는 행진곡을 합창하는 남성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벨벳 제복에 파란 헬멧을 쓴 병사들이 4열 종대를 이루어 그란비아 대로를 행진하고 있었다. 주로 폴란드인, 독일인,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1,900명 규모의 국제여단이었다.
그들은 여러 나라 말로 인터내셔널을 불렀고, 이들을 소련 대군의 선봉 부대로 여긴 마드리드 시민들은 끝없이 환호했다.

이 증원 부대는 즉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폴란드인 대대는 도시 남쪽 비야베르데(Villaverde)로, 독일인 절반과 영국인 기관총 사수 그룹은 북서쪽 고지의 시우다드 우니베르시타리아(대학 도시)로, 프랑스인 대대와 나머지 독일인 병력은 정 서쪽 만사나레스 강 건너편, 약 15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마드리드의 구릉성 삼림공원 카사 데 캄포(Casa de Campo)로 각각 배치되었다.

카사 데 캄포를 두고 벌인 공방

카사 데 캄포는 시우다드 우니베르시타리아에서 약 2,500미터 떨어진 가라비타스 산(Monte Garabitas)이 군림하는 요충지로, 국민파의 주요 공격 목표 중 하나였다. 국민파의 계획은 공원을 석권하고 방어군을 만사나레스 강 너머로 후퇴시킨 뒤 몽타냐 병영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들은 강력한 역공에 발목이 잡혀, 결국 가라비타스 산 고지만 확보하는 데 그쳤다. 그래도 이는 결코 작은 전과가 아니었다. 국민파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고지를 끝내 내주지 않았으니까.
공화파의 사기를 북돋고 군사적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국제여단 병사들은 민병대 4명당 1명의 비율로 배속되어 교관 역할을 맡았다. 참호가 팠고 기관총이 다시 설치되었으며, 국민파의 측면 우회 시도는 그때마다 즉각적으로 막혔다. 베르됭 전투를 치렀던 경험까지 있는 프랑스인 국제여단 병사들에게, 마드리드의 구호 "노 파사란(No pasarán, 그들은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은 가슴 깊이 울려 퍼졌다.

치열한 전투와 막대한 희생

아프리카군 병사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전선에 동원되었다. 공화파 측에서는 훈련이 부족한 병사들이 아무런 엄호 없이 치명적인 기관총 화망 아래 전진해야 했고, 국제여단은 버티기조차 어려운 진지를 필사적으로 방어해야 했다. 양측의 손실은 매우 컸다.

불과 사흘 만에, 그란비아 대로를 노래 부르며 행진해 들어왔던 국제여단 병력의 3분의 1이 전사했다. 한편 아프리카군 역시 이 짧은 전투에서, 카디스부터 마드리드까지의 긴 행군 내내 입었던 것보다 더 많은 전사자를 냈다.

카탈루냐의 들판에서 영광을 쌓았던 한 아나키스트 부대는 시내 거리로 돌입했다가 은폐된 기관총 화망에 놀라 패닉 상태에 빠졌고, 결국 국민파가 카사 데 캄포를 통과해 만사나레스 강을 건너 시우다드 우니베르시타리아에 진입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말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투는 문자 그대로 악몽이 되었다.

국민파가 대학 건물의 어느 한 층을 차지하면 공화파는 바로 위층이나 아래층에서 맞섰고, 때로는 국제여단 병사들과 외인부대원들이 단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방에서 총구를 겨누기도 했다. 벽과 바닥은 곡괭이로 뜯어 길이 열렸고, 적에게 던져진 수류탄이 다시 되던져지기도 하는, 그야말로 초근접 백병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