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6년 프랑스 크레시앙퐁티외(Crécy-en-Ponthieu)에서 태어나 1346년 세상을 떠난 룩셈부르크의 요한 1세(Jean Ier de Luxembourg)는 '눈먼 왕(Jean l'Aveugle)'이라는 별칭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의 인생은 기사도 시대 유럽의 격동기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보헤미아의 왕이 되다
요한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이었습니다. 1310년,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벤체슬라스)의 여동생 엘리자베트와의 결혼을 통해 그는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즉위하자마자 그는 왕국의 통치를 아내에게 맡기고 스스로 유럽 곳곳의 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유럽 전역을 누비던 전쟁의 삶
1322년에는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훗날의 황제 루트비히 4세)가 뮐도르프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고, 1328년에는 프랑스 국왕과 함께 플랑드르를 상대로 싸웠습니다. 이듬해인 1329년에는 발트 지방에서 싸우던 튜턴기사단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 원정과 정치적 갈등
1331년, 루트비히의 대리(代理)로서 이탈리아에 파견된 요한은 크레모나, 파르마, 파비아, 모데나를 차례로 손에 넣으며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2세는 이탈리아 왕관을 내주겠다는 제안으로 그를 황제 진영에서 떼어놓는 데 성공합니다. 이에 분노한 루트비히는 보헤미아를 선동해 요한에게 반기를 들게 했지만, 요한은 빠르게 권위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루사티아와 모라비아 방면으로 영토까지 확장했습니다.
발루아 왕조와의 혼맥
발루아 가문과 돈독한 우정을 나눈 그는 프랑스에 자주 머물렀으며, 1332년에는 딸 보느(Bonne)를 프랑스 왕자 장(훗날의 국왕 장 2세)과 결혼시켰습니다. 이 혼인 동맹 덕분에 요한은 프랑스의 샤를 5세의 외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크레시 전투, 영광스러운 최후
1339년경 실명에 이른 그는 1346년 아들 카를(훗날의 신성로마황제 카를 4세)을 황제로 선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몸이 불편해졌음에도 그는 이를 핑계로 삼지 않고 잉글랜드군과의 크레시 전투에 직접 뛰어들었고,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말고삐를 호위 기사들의 말에 묶게 하여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고 전해집니다.
연대기 작가 프로아사르(Froissart)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 날 전장에서 그의 부하들은 "주군을 중심으로 사방에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말들은 서로 묶여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기사도 시대의 상징
요한 1세는 초창기 발루아 왕조 시대의 기사도 유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실명이라는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장을 선택한 그의 삶은 오늘날까지도 용기와 명예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