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드베뉘스(Tard-Venus, '늦게 온 자들'이라는 뜻)는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 전역을 약탈하며 공포에 떨게 했던 용병 무리(루트기에르)의 통칭이다. 이들은 장 2세(장 르 본) 말년에 리옹네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며 프랑스 중세사 최대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역사적 배경: 평화가 낳은 재앙
1360년 5월 8일, 백년전쟁의 제1국면을 마무리한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었다.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내 점령 요새에서 자국 용병들을 철수시켰으나, 전쟁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수만 명의 용병들은 졸지에 갈 곳을 잃었다. 독일, 브라반트, 가스코뉴, 플랑드르, 에노, 브르타뉴 출신 용병들과 프랑스 출신 모험가, 전쟁으로 몰락한 기사들이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새로운 무리를 결성했다. 이들이 '타르드베뉘스', 즉 '남들 다 간 뒤 프랑스라는 사냥터에 뒤늦게 몰려든 자들'이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프랑스 중부를 휩쓴 약탈의 행로
이들은 샹파뉴 지방에서 시작해 주앙빌 성을 점령하고 몸값을 받아낸 뒤, 랑그르·툴·베르됭 주교구를 초토화시켰다. 부르고뉴로 진입해 일부 부르고뉴 기사들의 비호 아래 베장송, 디종, 본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베르주, 제브레앙뵈누아 등을 약탈했다. 1361년 말부터 1362년 초까지 샤롱을 기습하려 시도했으며, 1362년 사순절 무렵에는 전 무리가 약 1만 5천 명에 달하는 대세력을 형성했다.
주요 두목들
가장 강력한 두목은 2,000명의 용병을 거느린 세갱 드 바드폴(Séguin de Badefol)이었다. 장 프로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탈바르 탈바르동, 기오 뒤 팽, 에스피오트, 프티 메생, 바타예, 프랑크 에네킨, 부르 카뮈, 부르 드 레스파르, 부르 드 브르퇴유, 노동 드 바주랑, 라미, 아그르 드 레스코, 알브레스트, 우리 독일인, 부르데유, 베르나르, 드 라 살, 오르텡고 드 라 살, 로베르 브리케, 크레스웨이, 아마니외 도르티그, 가르시오 뒤 카스텔, 기요네 드 포 등 수많은 두목이 이름을 올렸다.
브리냐이 전투와 왕정의 위기
1362년 사순절, 타르드베뉘스 전군이 아비뇽의 부유한 교황청을 노리고 마콩주, 리옹네, 포레즈를 거쳐 에스티바레이으 수도원을 점령하며 남하하자, 장 2세는 사촌 자크 드 부르봉(라 마르슈 백작)에게 토벌을 명했다. 라 마르슈 백작은 몽펠리에와 아비뇽을 거쳐 포레즈로 북상하며 오베르뉴, 리무쟁, 프로방스, 사부아, 도피네, 부르고뉴 공국과 백작령의 영주들을 규합, 장 드 믈룽(탕카르빌 백작) 지휘 아래 리옹과 마콩 사이에 집결시켰다.
타르드베뉘스 두목들은 생장드론(제분소 파괴, 창고 약탈), 투르누를 장악하고 샤롱 인근에 집결한 뒤 포레즈로 진격해 보졸레(이미 1360년 앵글로-가스코뉴군에 약탈당함), 리옹네를 초토화시키고 샤를리외 포위 공격에 실패했으나 마르시니, 소그, 몽브리종을 황폐화시키고 1362년 3월 중순 리브드지에르와 브리냐이 성을 점령했다. 리옹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장 드 그롤레(마콩 보방)는 생쥐스트 지구 포병 보강 등 방어에 나섰다.
북쪽에 있던 장 드 믈룽의 군대는 포레즈 백작 루이 드 포레즈 군대와 보주, 빌라르, 투르논, 샬랑송 영주들, 장 드 샬롱, 부르고뉴·콩테 귀족들, 갈루아 드 라 보姆 지휘 사부아 기병대가 합류해 전력을 키웠다. 장 드 믈룽은 남쪽에서 베테랑 마르샬 아르눌 도드렘과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후일 카스티야 왕 엔리케 2세)가 이끄는 스페인 용병대의 합류를 기다렸으나, 정찰병이 '에코르쇠르(약탈단)의 일부'만 확인했다는 오보를 믿고 전위대장 아르노 드 세르볼(생장드론 주임신부)에게 브리냐이 성 돌격을 명령했다.
1362년 4월 6일, 브리냐이 전투
타르드베뉘스는 라 마르슈 백작 자크 드 부르봉이 지휘하는 프랑스 왕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뒀다. 이 승리로 프랑스 왕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용병단은 포레즈 백작령을 마음껏 유린했다.
아비뇽 행진과 교황의 대응
승리 후 세갱 드 바드폴은 3,000명을 이끌고 안스를 점령, 마콩주, 리옹 대교구, 보주 영지, 마르시니레노넨까지 몸값을 받아냈다. 노동 드 바주랑, 에스피오트, 크레스웨이, 로베르 브리케, 오르텡고 드 라 살, 베르나르데 드 라 살, 라미, 바타예, 부르 카뮈, 부르 드 레스파르 등은 아비뇽으로 진격해 교황과 추기경들의 몸값을 노렸다. 부르 드 브르퇴유는 1,200명으로 오베르뉴를 휩쓸다 6월 3일 몽팡시에에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의 스페인·카스티야 기병 400명에게 전멸당했다.
퐁생테스프리 요새에 거금이 보관됐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타예, 기오 뒤 팽, 에스피오트, 부르 카뮈·레스파르, 라미, 프티 메생 등은 야간 강행군 15리그(약 60km)로 새벽에 요새를 기습 점령, 막대한 부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이 소식에 샹파뉴, 브리, 오를레아네, 샤르트르, 블루아 백작령, 앙주, 메인, 투렌에 흩어져 있던 타르드베뉘스 잔당들도 론 계곡으로 몰려들었다.
아비뇽의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이들을 상대로 십자군을 선포했으나, 면죄부만 약속되었을 뿐 실질적 보상이 없자 십자군 병사들은 귀가하거나 오히려 약탈단에 합류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타르드베뉘스의 종말: 이탈리아 원정과 두목들의 최후
십자군의 완전한 실패로 교황은 몬페라토 후작 장 2세에게 6만 금 플로린을 주어 타르드베뉘스를 용병으로 고용, 이탈리아로 파견케 했다. 주요 두목들은 밀라노의 군주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와 베르나보 비스콘티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안스를 지키고 이탈리아행을 거부한 세갱 드 바드폴은 1363년 9월 13일 브리우드를 점령하고 1년 이상 르퓌, 라세즈디외, 클레르몽, 몽페랑, 실라크, 리옹, 노네트, 이수아르, 보다블, 생보네라르시 등 오베르뉴 전역을 약탈했다. 결국 브리우드를 몸값 받고 넘긴 뒤 고향 가스코뉴로 돌아가 나바라로 향했으나, 나바라 왕 카를 2세의 명으로 무화과에 독을 타 살해당했다.
타르드베뉘스 사태는 브레티니 조약의 '불완전한 평화'가 낳은 비극이자, 중세 말 봉건제의 모순과 용병 제도의 폐해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