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틴 전투는 1187년 갈릴리 호 서쪽 티베리아스 근교에서 벌어진 중세 역사의 큰 전환점입니다.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연합군과 기 드 뤼지냥 왕이 지휘하는 예루살렘 왕국의 프랑크(십자군) 군대가 정면 충돌했으며, 이 전투의 결과는 성지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전쟁의 배경
거의 한 세기 전, 보이용의 고드프루아가 이끈 제1차 십자군은 무슬림 세력이 분열된 틈을 타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시는 극도의 잔혹함과 학살로 물들었고, 그 피바다 위에서 십자군은 동방에 라틴 국가들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1187년 무렵, 성지의 프랑크인들은 처음으로 무슬림의 군사적 우위 앞에 무력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살라딘(살라흐 앗 딘)의 깃발 아래 이집트와 시리아가 하나로 통합된 반면, 예루살렘 왕국은 내부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궁정의 술수로 왕위에 오른 기 드 뤼지냥은 인망이 얇았고 살라딘의 기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살라딘과 맺은 평화 조약의 준수조차 꺼렸습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그의 친족 르노 드 샤티용이었습니다. 약탈과 모험으로 이름난 이 호전적 영주는 여러 차례 살라딘을 도발했고, 1181년에는 평화 시기에 무슬림 상단을 습격해 막대한 손실을 안겼습니다.
이 공격에 분노한 살라딘은 당대 기록에 따르면 20만에 이른다고 전해지는 대군을 이끌고 르노의 영지 방면으로 진격해 티베리아스를 빠르게 점령했습니다. 이후 긴장은 일단 수습되었고, 1185년 살라딘은 프랑크 국가들과 포괄적 휴전 협정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르노의 도발은 계속되었고,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하틴으로 향한 진군
성전기사단(템플 기사단) 단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는 사라센에 대한 전면전을 주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기 드 뤼지냥을 설득해 군대를 소집하게 만들었고, 평화 노선을 원하던 트리폴리 백작 레몬의 반대를 무릅쓴 채 군대는 사막 방면으로 행군했습니다.
1187년 7월 3일, 티베리아스로 진격하던 프랑크군은 하틴의 건조한 구릉지대로 들어섰습니다. 강행군에 지친 병사들은 물이 바닥난 상태였고, 뙤약볕 아래에서 전투 준비조차 제대로 갖출 수 없었습니다.
전투의 경과
전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탈진하고 탈수 증세에 빠진 프랑크 병사들은 제대로 설 수도 없었던 반면, 살라딘의 군대는 신선하고 잘 조직되어 있었으며 병력 수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살라딘은 적을 완전히 포위한 뒤 주변의 마른 풀숲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길로 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갈증과 공포에 몰린 십자군은 저항할 힘을 잃었고, 전투는 살라딘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전력 차이가 극명했던 이 전투는 사실상 기독교군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로 기록됩니다.
전투 이후
포로로 잡힌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용은 살라딘 앞에 끌려갔습니다. 살라딘은 반복된 배신과 약탈의 주범이었던 르노를 그 자리에서 처형했으며, 기 왕은 이후 석방되었습니다.
군대와 지도층을 잃은 예루살렘 왕국은 저항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살라딘의 군대 앞에서 요새들이 차례로 함락되었고, 1187년 10월에는 예루살렘마저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백 년 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이 폭력과 학살로 치닫던 것과 달리, 살라딘은 도시의 기독교도들에게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는 관용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처신은 그를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경받는 인물로 만든 요인 중 하나입니다.
성지 함락의 소식에 유럽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제3차 십자군을 선포했고,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사자심왕)를 비롯한 유럽의 군주들이 성지 탈환을 위해 출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