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4 - 십자군의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십자군의 실제 규모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십자군조차 전투 인원이 1만 명을 넘긴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 두 차례의 십자군이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라는 인상을 남긴 것은, 행렬에 포함된 비전투원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원정대의 발목을 잡고 진군을 지연시켰으며, 때로는 과격하고 통제 불능인 행동으로 원정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비전투원의 배제와 전문 군인 중심의 재편

제2차 십자군 이후 당국은 이러한 비전투원들의 출발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 결과 13세기에 들어서면 십자군은 직업 군인 혹은 전문적으로 훈련된 병사들이 주축을 이루는 조직으로 탈바꿈합니다. 민중은 더 이상 십자군의 정식 구성원으로 편입되지 못했고, 오직 용병으로 고용되는 경우에만 원정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통제 불능의 '민중 십자군'

13세기와 14세기에 남은 유일한 '민중' 십자군은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는 거친 운동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초기 민중 십자군 특유의 열정이 다시 나타났지만, 동시에 그 무질서와 혼란도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어린이 십자군(1212년)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212년 프랑스와 독일의 수천 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동원한 어린이 십자군입니다. 안타깝게도 마르세유의 일부 상인들은 이 사태를 기회로 삼아 어린 순례자들을 배에 태운 뒤, 이집트로 운반하여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목동 운동(Pastoureaux)

1250년에는 '목동들(Pastoureaux)'이라 불리는 집단이 등장했습니다.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 '헝가리의 마스터(Master of Hungary)'의 지휘 아래, 이들은 제7차 십자군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성 루이)를 구출하기 위해 봉기했습니다. 그러나 운동은 점차 농민 반란인 '잭크리(jacquerie)' 성격의 폭동으로 변질되었고, 결국 카스티야의 블랑슈 섭정이 무력으로 이를 진압해야 했습니다(1251년). 이후 '목동들'이라 불리는 무리는 1320년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