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무 미겔 드 카스트로, 야스페르 베크 작, 1643년경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소장). 콩고 왕국의 대사로서, 사촌인 소요 백작과 콩고 왕 가르시아 2세 간의 분쟁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파견되었다. ⓒ WIKIMEDIA COMMONS
148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직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못했고 바스쿠 다 가마 역시 아프리카 우회 항로를 찾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구자인 용감한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이미 이 대륙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디오구 카웅(Diogo Cão)의 지휘 아래, 그들은 그해 엄청난 수력을 자랑하는 강의 하구로 진입했고, 그때까지 마주친 어떤 곳보다도 더 크고 조직적인 왕국의 해안에 상륙했다.
그들은 통치자인 마니콩고(Mani Kongo)의 이름을 따 이 땅을 "콩고"라고 명명했다. 오늘날에는 고대 왕국과 지역 민족은 Kongo, 두 개의 현대 국가와 강은 Congo로 표기해 구분하는 관습이 정착되었다. 원주민들은 이 강을 '응자디(Nzadi)'라고 불렀고, 포르투갈인들은 이를 "자이레(Zaire)"로 적었다.
콩고인들의 경외
디오구 카웅과 그의 부하들은 규모, 행정 구역, 총독, 화폐, 무역로에 이르기까지 기묘하게도 자신들의 나라와 닮은 왕국을 발견하고 놀랐다. 한편 콩고인들 역시 기묘한 도구를 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흰 피부의 이방인들을 보고 경탄했다. 그들은 아마도 이들을 알비노의 탄생과 연결 짓던 수호 정령으로 여겼을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이 "포르투갈 왕"의 나라에서 왔다고 밝히고 화려한 선물을 내놓자, 콩고인들은 그 군주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존재라고 상상했다.
양측의 이러한 매혹은 상호 교류로 이어졌다. 디오구 카웅은 선물을 가득 실은 사절단을 콩고 왕에게 보내고, 콩고 신하 몇 명을 데리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485년 두 번째 원정 때 함께 돌아온 이 젊은 콩고 귀족들은 "물 저편의 다른 세계"의 부유함을 생생히 증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에서 "성신앙의 주요 교리, 예법과 언어"를 배운 그들은, 열흘간의 도보 여행 끝에 수도 음반자콩고(Mbanza Kongo)에 도착했을 때 응징가 응쿠우(Nzinga a Nkuwu) 왕의 개종 의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응징가 왕의 세례
3년 후, 첫 체류 기간 동안 이미 포르투갈어와 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익힌 이 젊은 귀족들은 왕국의 최고위 관리 한 명과 함께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사절로 파견되어, 자신들의 군주가 기독교인이 되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주앙 2세는 즉각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고, 라틴어로 말하고 쓰는 법을 가르치며, 가톨릭 신앙의 계명을 가르치라"고 명령했다.
1491년 사절단이 귀국하자, 응징가 응쿠우 왕은 포르투갈 왕의 이름을 따 세례를 받고 주앙 1세(João I)가 되었다. 당시 기록에는 그의 동기가 명확히 남아 있지 않지만, 콩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세례를 일종의 새로운 형태의 입성 의식으로 받아들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 새로운 종교가 상징하는 초자연적 힘을 왕실과 콩고 엘리트의 이익에 활용함으로써 영적·정치적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1509년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아폰수 1세(Afonso I) 역시 수많은 젊은이들을 포르투갈에 유학 보냈는데, 그중에는 아들 헨리크(Henrique)도 있었다. 헨리크는 사제가 되었고, 1518년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주교가 되었다.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최초의 콩고 왕들은 유럽을 경험한 젊은 지식인들, 즉 자국의 인텔리겐치아에 힘입을 수 있었다.
주목할 점은, 가톨릭 수용의 주역이 선교사가 아니라 유럽 생활을 경험한 콩고의 젊은 지식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들이 기독교의 핵심 개념을 모국어인 키크온고어(Kikongo)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문서들은 그들에게 포르투갈 왕이 "세상의 힘"의 주인인 하나님과 동일시되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예수, 성인, 천사는 어느 정도 호의적인 존재들과 정령들에 비유되었다. 성모 마리아에 관해서는 성년 여성이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개념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져, "특별한 여인"이라는 뜻의 용어로 불렸다.
가톨릭과 토착 신앙의 공존
초기부터 유럽 성직자들이 콩고에 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콩고인의 손에 남아 있었다. 계몽군주였던 아폰수 1세는 귀족 자제들에게 포르투갈어 읽기·쓰기를 가르치고 라틴어를 교육하며 기독교화하기 위한 대규모 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수도에 학교를 건립했고, 1516년부터는 남녀 학생 1천 명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목표는 나머지 인구를 교육하고 개종시킬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폰수는 이렇게 왕국 전역에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는 전체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고, 이 종교는 그의 권위를 강화하면서 두 신앙 체계를 조화롭게 융합했다.
기독교는 기존의 수많은 의식에 통합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식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과 토착 신앙이 공존하는 이 특별한 형태의 종교 융합은 콩고가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사실 덕분에 가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럽 성직자들은 왕의 열정에 매료되어 온건한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후 콩고에 잇달아 파견된 선교사들과의 마찰의 씨앗이 되었다. 1548년부터는 예수회가, 1555년 추방 후에는 도미니코회, 카르멜회, 프란치스코회가, 그리고 1645년부터는 카푸친회가 활동했다.
당시 수도 음반자콩고는 최대 6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로, 광대한 왕실 구역으로 둘러싸인 궁전, 수백 명의 포르투갈인이 거주하는 지구, 대성당, 7개의 예배당, 3개의 교회, 그리고 포르투갈어·라틴어·교리문답을 가르치는 수도원을 갖추고 있었다.
외교와 상업의 교류
가톨릭이면서도 매우 이국적인 콩고 왕국은 유럽을 매료시켰고, 유럽은 종교적 측면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었다. 유럽 군주에 준하는 존재로 여겨진 아폰수 1세에게는 당시 문장집에서 포르투갈 왕과 보헤미아 왕의 문장 사이에 배치될 문장이 부여되었다. 콩고 귀족들은 '두케(Duque)', '마르키스(Marquês)', '콘데(Conde)', '돔(Dom)' 같은 포르투갈 귀족 칭호를 차용했다. 콩고의 통치자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브라질, 네덜란드, 교황청과 사절을 교환했다.
이러한 외교 관계의 감동적인 증거로, 로마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전에서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대사 도무 안토니오 마누엘 은사쿠 네 분다(Dom Antonio Manuel Nsaku ne Vunda)의 대리석 흉상이 있다. 그는 4년간의 험난한 여정 끝에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하기 위해 도착한 직후인 1608년 1월, 탈진으로 세상을 떠났다.
외교 교류와 함께 상업 교류도 발전하여, 콩고는 구리, 상아, 라피아 직물, 그리고 빠르게는 노예를 유럽으로 수출했다. 노예 제도는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부터 존재했지만, 그들의 폭발적인 수요는 콩고 통치자들을 더 많은 포로를 확보하기 위한 정복 정책으로 이끄는 과정을 촉발했다.
이 지역 출신의 노예들은 신대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맨해튼에서 플로리다, 서인도제도를 거쳐 브라질까지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콩고 기원의 단어들이 브라질에서 널리 쓰이며, 심지어 영어(peanut: 땅콩)나 프랑스어(zombie: 좀비)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7세기 말부터 내전과 왕위 계승 분쟁이 마니콩고 왕국을 잠식해 갔다. 그러나 왕국은 1888년에야 포르투갈에 최종적으로 패배하여 앙골라 식민지에 편입되었다. 그 화려했던 과거의 기억은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연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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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발랑디에(Georges Balandier), 『16~18세기 콩고 왕국』, 파야르(Pluriel),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