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3차 십자군: 살라딘과 리처드 사자심왕의 성지 대결

1189년에 시작되어 1194년에 끝난 제3차 십자군은 프랑스 국왕, 잉글랜드 국왕, 그리고 독일 황제가 함께 이끈 대규모 원정으로, 살라딘에게 빼앗긴 성지(聖地)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함락

살라딘은 1169년부터 이집트를 다스리며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 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모두 장악한 그는 십자군 왕국을 포위했고,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승리한 뒤 같은 해 10월 2일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 세력은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티레, 마르가트 등 일부 거점에만 머물게 되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는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필리프 오귀스트)는 서로 간의 전쟁을 중단하고, 새로운 십자군 원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살라딘 십일조'를 부과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는 곧 전쟁을 재개했고,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훗날의 사자심왕)는 아버지에게 반란까지 일으켰습니다.

십자군의 아크레 함락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역시 교황의 호소에 응답하여 1188년 3월 27일 마인츠 대성당에서 십자가를 받들었고, 1189년 가장 먼저 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라딘과 비밀 조약을 맺은 비잔틴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방해에 부딪혔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비잔틴 영토를 최대한 빠르게 통과해 1189년 5월 18일 이코니움(콩야)을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190년 6월 10일 강을 건너다 익사하면서 원정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의 군대는 살라딘보다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죽음 직후 흩어졌으며, 시리아에 도착한 잔여 병력도 곧바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리처드와 필리프는 1191년 각각 바다 경로로 따로 도착했습니다. 항해 도중 리처드는 키프로스에 들렀는데, 섬의 통치자 이사키오스 두카스 콤네노스가 자신에게 저지른 무례한 행동에 격분했습니다. 5월 말까지 리처드는 섬 전체를 정복했고, 이곳을 나중에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루지냥에게 넘겼습니다. 한편 필리프는 티레에 도착해 성지의 지배권을 노리던 몽페라의 콘라드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프리드리히 군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생장다크르(아크레)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고, 6월에 도착한 리처드가 공성전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살라딘의 군대가 돌파를 시도했지만 격퇴되었고, 아크레는 7월 12일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승전 이후 세 명의 기독교 지휘관들은 권력 다툼에 돌입했습니다. 독일군을 이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와 필리프에 필적하는 대접을 요구했지만, 리처드는 성벽에 걸린 레오폴트의 깃발을 내려버렸습니다. 필리프 역시 리처드의 오만한 태도에 지친 나머지 8월에 성지를 떠났습니다.

리처드와 살라딘의 평화 조약

1191년 8월 22일, 리처드는 살라딘이 아크레 항복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자 포로로 잡은 무슬림 3,000명을 처형했습니다. 이후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격의 발판으로 야파 항을 점령하기로 결정했고, 살라딘은 아르수프 전투에서 이를 막으려 했으나 리처드에게 화려하게 패배했습니다.

1192년 1월, 리처드는 예루살렘 진격을 준비했지만 살라딘은 이미 증원군을 확보하고 도시 방어를 강화한 상태였습니다. 리처드는 두 차례나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서도 살라딘의 더 큰 군대 앞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라딘은 7월에 야파 탈환을 시도했지만 7월 31일 리처드의 군대에게 다시 패배했습니다.

결국 1192년 9월 2일 양측은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 아래 남되, 무장하지 않은 기독교 순례자들에게는 계속 개방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야파에서 하이파까지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의 좁은 지역은 기독교 측에 반환되었습니다. 리처드는 9월 말 성지를 떠나 서유럽으로 귀환하며 제3차 십자군을 마무리했습니다.

튜턴 기사단의 창설과 유럽 내부의 분쟁

제3차 십자군은 근동(近東)보다 오히려 유럽에 더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원정 이후 성지에 남은 독일인들이 모여 훗날 발트 지역 십자군 원정에 나서게 되는 튜턴 기사단(독일 기사단)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편 제3차 십자군의 실패는 6년 뒤 제4차 십자군 소집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레오폴트 공작은 아크레에서의 리처드의 행동을 오래도록 원망하다가, 1192년 리처드가 독일을 거쳐 잉글랜드로 돌아가던 길에 그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리처드는 신이 자신에게 예루살렘 정복을 명하지 않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순례자로서도 끝내 예루살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서둘러 서유럽으로 돌아간 것은, 자신이 없는 동안 그의 영토를 잠식한 동생 존(무지왕)과 필리프 2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