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2세 오귀스트, '오귀스트 왕' 또는 '정복왕'
필리프 2세 오귀스트(Philippe II Auguste)(1165년 파리 ~ 1223년 망트)는 프랑스의 국왕이다. 루이 7세와 샹파뉴 가문의 아델 사이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외아들이었기에, 처음에는 '데우도네(Dieudonné, 하늘이 내려준 아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중세 말기까지 그는 대개 '정복자(le Conquérant)'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오늘날 통용되는 '오귀스트(Auguste)'라는 호칭은 왕의 주요 전기 작가였던 리고르(Rigord)가 붙인 것인데, 필리프가 8월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보다 유력한 설은 카롤링거 황제들의 후계자로서의 권리 주장을 환기시키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조숙하게 드러난 왕의 기질
1179년 5월 왕위에 공동으로 올랐던 필리프는 1180년 무렵 부왕의 죽음으로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왕권을 나누어 가지던 이 시기에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튼튼한 체구를 지닌 이 소년(그렇다고 해서 머리를 단정히 빚은 것도, 공부에 열심인 것도 아니었다)의 강렬한 성격은 보기 드물 정도로 조숙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왕대비 아델의 오빠인 샹파뉴 백작은 우선 보호자의 모습을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지 확장에만 몰두하던 그는 물론, 그의 동생인 블루아 백작, 그리고 상스르 백작과 랭스 대주교까지 어린 왕에 대한 후견권을 확립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필리프는 독립을 위해 궁내원수 로베르 클레망과 클레르몽 백작 라울의 조언을 구했다. 또한 불만 세력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달자스(Philippe d'Alsace)와 동맹을 맺었다.
플랑드르 카드와 첫 번째 승리
이 동맹에서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된 결혼이 탄생했다. 프랑스의 필리프는 새 동맹국의 조카 이자벨 드 에노(Isabelle de Hainaut)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숙모이자 플랑드르 백작부인인 이자벨 드 베르망두아의 장차 돌아올 상속권을 안고 온 처지였다. 지참금으로 제공된 것은 곧 '아르투아'라고 불리게 될 지역이었다.
권력을 잡은 '소왕'은 이제 '왕'이 되어 플랑드르 카드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삼촌들에게 예속되었을 때보다 훨씬 가혹한 지배에 놓이는 길이었다. 험한 인물 필리프 달자스는 죽은 아내의 권리를 조카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고, 백작과 주군 사이에는 균열이 생겼으며, 왕에게는 적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필리프는 플랜태저넷 가문의 앙리 2세, 특히 자신의 편으로 만든 '궁정의 앙리(Henri au Court Mantel)'와의 우교를 믿고 자신의 힘을 확신했다.
그는 먼저 플랑드르 백작이 파리에서 9리그(약 45km) 거리까지 진격한 무시무시한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어 적절한 시점의 원정과 거점 함락을 통해, 가문의 충성 전통을 저버린 변덕스러운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를 다시 복속시켰다. 곧 블루아 백작과 상스르 백작, 그리고 랭스 대주교마저 차례로 굴복해야 했다. 이러한 연이은 승리 끝에 샹파뉴 백작과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고립된 필리프 달자스는 판세가 기울었음을 자각했다. 1185년 7월 아미앵 협정 체결 이후 아미앵·몽디디에·루아예의 영주권이 왕령지에 편입되었다. 갓 스무 살이 된 필리프 2세는 군 지휘관으로서 손색없는 명성을 얻었다.
플랜태저넷 제국과의 대결 준비
그러나 역사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이는 하나의 수련에 불과하다. 이 통치기의 진짜 대업, 즉 플랜태저넷 제국과의 가차 없는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프랑스 왕은 전쟁이 조만간 일어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주군의 권위를 내세워 앙리 2세의 아들들이 아버지에 대해 일으킨 반란, 먼저 '궁정의 앙리'의 반란, 이어서 조프루아의 반란을 지원함으로써 교묘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이 정책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노르망디 공작 출신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된 인물에 맞선 최초의 프랑스 왕 필리프 1세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이었다. 증손자에게 위험은 한층 더 컸다. 앙리 2세는 상속으로 앙주 백작이 되고, 결혼으로 아키텐 공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늙은 플랜태저넷에게는 아버지와도, 서로 간에도 오래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무려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 상황을 완벽히 간파한 필리프는 1187년 음지의 공작을 접고 양지의 개입으로 전환했다. 베리-샹파뉴 방면 원정을 통해 몇몇 영주권을 합병할 수 있었는데, 그 자체의 중요성은 평범했지만 전쟁을 대비하기에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이쉬당 문제, 1187년 샤토루 조약).
그다음에는 훗날 '사자심왕(Lion Heart)'이 될 리차드가 낚여 들어갔다. 1189년 죽음을 며칠 앞두고 앙리 2세는 발랑 혹은 아자이 항복 조약에 서명하여, 그때까지 아키텐에 속해 있던 오베르뉴 백작령에 대한 종주권과 그라세, 이쉬당, 샤토루의 성주권 포기를 강요당했다. 리차드가 권력에 오르면서 게임의 판은 바뀐다. 적대 행위가 재개될 것으로 예상되던 바로 그때, 제3차 십자군이 호기 좋게 등장해 두 왕을 다시 한자리에 묶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