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금포 회담(1520년 6월 7일):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의 호화로운 만남


금포 회담(1520년 6월 7일):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의 호화로운 만남금포 회담(Field of the Cloth of Gold), 별명 '럭셔리 야영지(Bivouac de Luxe)'는 1520년 6월 7일 두 왕이 만난 역사적 무대입니다. 바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입니다. 프랑스 국왕은 의심 많은 잉글랜드 국왕과 동맹 조약을 체결해, 1년 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로 탄생한 새로운 정치 판도에 맞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담은 국고에 무려 20만 파운드나 되는 축제 비용을 들인 끝에 아무런 동맹 조약 없이 막을 내렸고, 결국 웃는 사람은 합스부르크가였습니다.

금포 회담은 왜 열렸을까?

막시밀리안 1세 사후 치러진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가 이 회담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와 스페인 국왕 카를 폰 합스부르크는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했습니다. 쾰른·마인츠·트리어의 세 대주교, 보헤미아 국왕, 작센 공작, 라인 팔츠백,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등 일곱 선제후로 구성된 회의가 새 황제를 뽑았는데, 원칙적으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어느 쪽이 더 많은 돈을 쥐어줬느냐에 따라 갈렸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선거를 위해 300만 에퀴를 쏟아부었지만 끝내 실패했습니다. 스페인 국왕은 거대 은행가 야코프 푸거를 내세워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1519년 6월 28일, 카를 폰 합스부르크가 황제 샤를 5세로 즉위합니다!

그날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격렬한 적대감이 싹텄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동맹 기반을 다져야 했고, 특히 잉글랜드 국왕과의 관계가 절실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1520년 6월 회담에 헨리 8세를 초청했습니다.

회담 준비

금포 회담(1520년 6월 7일):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의 호화로운 만남칼레 인근에서 프랑스 국왕은 잉글랜드 국왕을 맞이하게 됩니다. 라이벌끼리, 과도할 정도의 자존심끼리 마주하는 자리였습니다. 두 왕 외에도 세 명의 왕비, 왕자와 공주, 공작과 공작부인들이 운집했습니다. 5,000명의 노동자가 준비 작업에 동원되어 마을 두 개가 새로 지어졌고, 약 2,800개의 텐트가 설치되었습니다. 텐트는 벨벳이나 금천(金天)으로 덮였고, 미래 주인들의 문장으로 장식되었으며, 꼭대기마다 금사과 장식이 올려졌습니다.

헨리 8세는 6월 4일 잉글랜드령인 기네(Guînes)에 먼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크리스탈 팔레스'라 불린 목재와 유리로 된 성관을 세웠는데, 창문은 눈속임 그림(트롬프뢰일)으로 처리되었고, 건물 면적은 약 10,000제곱미터에 달했습니다. 튜더 가문의 색으로 칠하고 도금을 입힌 이 궁전에는 붉은 포도주가 솟는 분수 두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령인 아르드르(Ardres)에 숙소를 마련했습니다. 그의 텐트는 "알려진 가장 높은 탑만큼 높았고", 용을 베는 성 미카엘상이 얹혀 있었습니다. 네 개의 큰 방에는 금박 백합 문양을 새긴 파란 벨벳 태피스트리가 걸렸고, 외부는 구슬처럼 말린 금천으로 장식되었습니다.

투르산 비단으로 만든 나머지 텐트들은 프랑스의 클로드 왕비와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그리고 부르봉 대무관장, 토머스 울지 추기경, 프랑수아 1세의 정부인 샤토브리앙 백작부인 같은 저명 인사들에게 배정되었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영광으로 여겨진 귀족들은 텐트를 짓고 예복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을 탕진하고 집안의 모든 것을 팔아넘겼습니다. 당시 목격자들은 "저들이 어깨 위에 자기들의 제분소와 숲, 목초지를 지고 다닌다"고 기록했습니다!

플랑드르 평원에는 수놓은 깃발과 군기, 흥을 돋우는 광대, 공연 리허설에 여념이 없는 배우, 예장한 귀부인 곁을 오가는 기사들이 가득했고, 그 모든 것이 뿔피리와 나팔 소리 속에서 펼쳐졌습니다. 심지어 귀부인들의 애완견 목걸이에는 보석이 박혀 있었습니다.

금포 캠프, 호화로운 야영지

29세의 헨리 8세와 25세의 프랑수아 1세는 마침내 1520년 6월 7일 만났습니다. 각자 대무관장의 인도를 받아 은장식으로 치장한 큰 말을 타고, 포성과 함께 정확히 같은 순간에 서로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훗날 '의전(프로토콜)'이라 불릴 장면의 시작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은 흰 예복에 금신을 신었고, 잉글랜드 왕은 은과 보석으로 장식된 옷을 입었습니다. 두 사람 뒤로는 각각 400명의 궁수와 400명의 무사로 이루어진 호위대가 따랐습니다.

금포 회담(1520년 6월 7일):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의 호화로운 만남창으로 표시된 지점에서 두 왕은 단둘이 나아가 서로 인사하고 입을 맞춘 뒤, 말에서 내려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다시 말에 올라 첫 만남을 위해 마련된 천막으로 향한 두 사람은 대무관장들의 맞이를 받았습니다. 한 시간의 담화를 마친 뒤, 두 왕은 팔짱을 낀 채 시원하게 웃으며 각자의 천막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한 달간의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호화로운 연회(약 2,000마리의 양, 콩거장어 700마리, 왜가리 50마리, 겨자 4부셸, 여기에 말바자 와인, 클래릿, 부르고뉴와 보르도 산 포도주가 곁들여졌으며, 48시간 동안 무려 248가지 요리가 차려졌습니다), 무도회, 공연, 무용이 이어졌습니다. 6월 9일부터는 토너먼트와 각종 격투 대회의 시간이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는 서로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포츠, 예술, 그리고 여자. 게다가 결정적으로, 두 사람 모두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너무나 잘 통해서' 어느 날 아침 프랑수아 1세가 헨리 8세의 천막에 뛰어들어 직접 속옷 셔츠를 입혀주기까지 했습니다. 궁정에서 국왕의 옷을 입혀드리는 것은 최고의 영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훈훈한 관계에는 금이 갑니다. 맨손 격투 중 프랑수아 1세가 "형제여, 당신과 한 번 겨뤄보고 싶소"라고 제안했는데, 헨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프랑스 왕이 먼저 달려들어 그를 제압해버린 것입니다. 이 우월감 과시에 헨리 8세는 몹시 언짢았고, 이 일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됩니다. 이어진 양궁 대회에서는 헨리 8세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6월 23일에는 회담을 총괄한 울지 추기경이 교황 특사와 프랑스·잉글랜드 주교 20명의 보필 아래 미사를 집전했고, 이어 넓은 잔디밭 위에서 열린 대연회, 토너먼트와 격투 대회가 펼쳐졌습니다. 다음 날에는 두 왕비가 서로 선물을 교환했습니다.

프랑스 왕의 실망

6월 25일, 잉글랜드 진영과 프랑스 진영은 어떤 조약도 체결하지 못한 채 헤어졌습니다. 단 열흘 뒤 헨리 8세는 처가 쪽 조카뻘인 카를 5세를 그라블린에서 만났습니다. 카를 5세는 그를 겸손하게 맞이하며 완벽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헨리 8세는 프랑수아 1세의 우월함, 즉 그의 권력과 매력, 후대함에 상처받아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돈도, 군대도, 그 질적 수준에서도 프랑스 국왕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 처지였으니까요. 샤를 5세는 또 하나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결국 프랑수아 1세가 손에 쥔 것은 애매한 우호의 약속뿐이었습니다. 그의 정부인 샤토브리앙 백작부인은 이미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 남자를 조심하십시오. 그의 눈이 당신을 바라볼 때, 가끔 거짓의 빛이 비칩니다." 프랑스에게 씁쓸한 실패였던 이 회담은 결국 1525년 2월 파비아 대참패와 프랑수아 1세의 스페인 억류로 이어지는 복선이 되었습니다.

더 읽을거리

- 샤를 지르들루아송(Charles Giry-Deloison), 『1520년 금포 회담: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의 만남』, Somogy,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