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왕' 필리프 4세, 어떤 인물이었나

필리프 4세(Philippe le Bel, 1268~1314)는 1285년부터 1314년까지 재위한 프랑스 국왕으로, '용맹왕' 필리프 3세와 아라곤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비밀스럽고 논란이 많은 왕이었지만, 프랑스의 위대함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한 군주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17세에 즉위한 젊은 왕
1285년 페피냥(Perpignan)에 있던 마요르카 국왕의 성에서 아버지 필리프 3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필리프는 겨우 17세였다. 뛰어난 외모 덕분에 '미남왕(le Bel)'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에게 다가가는 이들을 놀라게 할 만큼 강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왕국의 일을 제외하면 그의 유일한 열정은 사냥이었다.
그는 경건하면서도 금욕적인 성품의 왕이었다. 교회와 여러 갈등을 빚었음에도 신앙은 두터웠고, 평생 오직 한 여인, 즉 1284년에 결혼한 나바르의 잔(Jeanne de Navarre)만을 사랑했다. 왕비 외의 여성들 가운데 존재가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이들은 궁정에서 내쫓았다고 전해진다.
자식들에게 엄격했던 아버지
왕비 잔은 그에게 루이, 필리프, 샤를 세 아들과 세 딸을 낳아 주었다. 딸들 중 성인까지 살아남은 이는 이자벨라 단 한 명뿐이었다. 왕자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했는데, 필리프는 자식들을 상당히 엄하게 대했다. 맏아들 루이는 왕실 평의회에서 마음껏 의견을 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동상"
당대 많은 이들은 필리프를 겸손하고 온화하며, 주변의 제안과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군주로 묘사했다. 반면 왕의 적수였던 파미에(Pamiers) 주교 베르나르 사이세(Bernard Saisset)는 이렇게 평했다. "그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는 동상이다."
오늘날 필리프 르 벨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왕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격했으며, 오직 왕국의 선과 위대함만을 걱정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를 폭군으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검소하게, 왕권에는 아낌없이
필리프는 개인적인 생활에서는 검소했지만, 궁정과 군주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재정을 투입했다. 대규모 건축 사업과 전원회의 개최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태어난 곳이자 죽기를 바랐던 퐁텐블로(Fontainebleau)를 특별히 아꼈고, 많은 중대 결정은 모뷔송(Maubuisson) 수도원의 고요한 은거 속에서 내려졌다.
한편 왕은 파리의 시테 궁(Palais de la Cité)에서도 대대적인 공사를 추진했다. 14세기 초, 생트샤펠(Sainte-Chapelle)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새롭게 재건되었고, 이 새 건축물들은 재위 말기 왕과 왕족의 주 거처가 되었다.
로마법을 무기로 삼은 현명한 정치가
필리프 4세는 유능한 참모들로 자신을 둘러싼 현명한 정치가였다. '레지스트(légistes)'라 불린 이들은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부르주아 출신으로, 왕의 측근이 되기 전에는 대개 사법·재정 분야의 관료였으며 로마법을 깊이 공부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로마법에서 봉건제와는 정반대되는, 고대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발상, 즉 국가는 독립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이러한 국가관은 13세기의 교황들과 보니파시오 8세가 내세운 교황 중심의 신정(theocracy) 이념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참모들은 필리프가 직접 작성한 서약서에 서명하여 왕과 그의 맏아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왕을 보좌한 핵심 인물들
가장 잘 알려진 참모는 1302년 쿠르트레(Courtrai) 전투에서 전사할 때까지 국새를 관리한 피에르 플로트(Pierre Flotte)이다. 그 뒤를 이은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는 교황 문제에서든 템플 기사단 문제에서든 왕의 가장 열렬한 심복으로 활약했다.
미천한 출신의 앙게랑 드 마리니(Enguerrand de Marigny)는 왕의 시종장 부빌(Bouville) 밑에서 비서로 경력을 시작해 이후 최고 요직들을 차지했다. 피에르 플로트 사후에는 노가레와 함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그는 탐욕스럽고 냉혹한 면모를 드러냈으며, 14세기 초의 거의 모든 재정·세무 운영에 관여했다. 그 결과 귀족들의 적대와 시기, 백성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아야 했다. 이 밖에도 피에르 드 라티이(Pierre de Latilly), 미셸 드 보르데네(Michel de Bordenai), 라울 드 프렐(Raoul de Presle) 등이 레지스트에 속한 인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