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필리프 2세: 정복자이자 행정의 달인

정복자 필리프 2세, 행정가로서의 진면목

필리프 2세(Philippe Auguste)는 '정복자'라는 별칭에 손색이 없는 군주였다. 하지만 그의 치세가 좌절 없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여러 프랑스 국왕들이 그와 맞먹는 군사적 행운을 누렸고, 어떤 이들은 전략 면에서 그를 능가하기도 했다.

그를 더 개인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조직 감각과 행정 정책이다. '필리프 조직가'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탁월한 수완으로 코뮌(자치도시)을 지원하고, 할아버지 루이 6세의 전례에 따라 특권 헌장을 부여했는데, 주로 왕령 밖에서 이루어진 조치였기에 왕권이 아닌 제후의 희생을 바탕으로 삼았다.

성직자들은 세속 권력의 교회 사무 간섭으로 불평할 일이 없었다. 종교 단체들은 왕실의 후원을 누렸고, 파리 대학교 역시 1215년 새로운 정관을 하사받았다. 그의 치세에 왕령과 군주 행정의 중심이 오를레앙에서 파리로 이동했으며, 파리는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필리프 오귀스트의 대성벽 등 갖가지 변모를 거쳐 안전하고 화려한 도시로 거듭났다.

왕정 행정의 기틀을 다지다

그의 통치 초기, 바이이(bailiffs)의 부상과 지방 세네샬(sénéchaux)의 왕실 관료화라는 결정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봉건 대리인이던 이들이 왕의 대리인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전쟁의 신경인 국가 재정 관리는 세심한 배려를 받아, 왕정은 건전한 국고에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프레테발(Fréteval) 전투에서 리카르 1세가 적의 짐을 노획해 간 사건을 계기로, 필리프 오귀스트는 인새(도장)와 헌장을 늘 휴대하는 위험을 깨달았다. 이후 왕실 문서고는 '헌장의 보물창고(Trésor des Chartes)'라는 안전하고 고정된 장소에 영구히 자리 잡게 되었다.

사생활의 그림자: 신경쇠약과 결혼 파동

멀리서 보면 강건해 보이는 이 군주는 사생활의 나약함으로 공적 직무 수행에 상당한 지장을 받았다. 성격은 단호했으나, 건장한 체구와 달리 신경이 예민했다. 청년 시절인 1179년 8월, 그는 르망 숲에서 훗날 샤를 6세가 겪은 발작과 유사한 환각 증세를 보였다. 며칠간의 우울 후 건강을 회복했으나, 완전하지도 영구적이지도 않았다. 신경 쇠약이 빈번히 그를 덮쳤다.

성지에서는 리카르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망상했고, 1192년 11월 퐁투아즈에서는 '산의 노인(하시신 교주)'의 자객들이 노린다고 믿어 경호원을 두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아내와의 불화 역시 신경 장애의 발현으로 봐야 할까?

잉게부르그와의 파란만장한 혼인

첫 부인 에노의 이자벨이 1189년 3월 아들 루이 하나만 남기고 사망하자, 왕실 사절단은 덴마크의 크누트 4세 여동생 잉게부르그(또는 이삼부르)를 새 신부로 맞이했다. 하지만 혼례 다음 날, 왕은 돌연 이별을 선언한다. 주교회의는 결혼 무효를 선고했는데, 그 사유가 신체적 부적합과 미완성(사실일 가능성이 컸음)이 아닌, 억지스러운 근친 혼인 금위 위반이었다.

이후 메랑의 아녜스가 세 번째 아내가 되어 여러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잉게부르그가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덴마크 궁정을 통해 로마에 호소하면서 사태는 확대된다. 첼레스티노 3세는 훈계에 그쳤으나, 후임 인노첸시오 3세는 단호했다. 1200년 1월, 왕국에 금령(interdict)이 내려졌다. 오랜 저항 끝에 왕은 굴복해 사랑하는 아녜스를 내보냈으나, 고집스러운 잉게부르그를 진심으로 아내로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1213년까지 연금 상태에 있다가 비로소 왕비의 권한을 회복했다.

시련을 넘어선 유산

솔직히 말해, 사생활의 좌절은 필리프 오귀스트의 위상을 깎아내리지 못했다. 그는 법리적 명분을 쥔 예외적 권위의 교황에게 양보했을 뿐이다. 결국 아녜스 소생 자녀들은 로마 법정에서 적출로 인정받았고, 왕권은 시련을 무사히 통과했다. 임종 시 그는 장남에게 탄탄한 왕국을 물려주었는데, 왕령 면적은 4배로 불어났다. 소심한 병합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공격이 방어를 압도했다. 몇 가지 예방책은 더 이상 불필요해졌다. 왕조는 뿌리가 충분히 깊어져 태자를 부왕과 공동 통치자로 세우는 관행을 폐지할 수 있었고, 모계로 최후의 카롤루스 왕조 후손인 루이 8세 '사자왕'이 필리프 2세 '정복자'의 뒤를 잇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