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4세(Philippe IV, 르 벨)는 대외적으로 재앙적인 아라곤 원정의 수렁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아라곤의 알폰소 3세(Alphonse III)의 조카였던 그는 1291년 알폰소에게 강화를 강요했다. 프랑스의 영향력을 북동부로 확장하려는 열망으로, 국왕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Edward I)와 동맹을 맺은 플랑드르 백작 기 드 당피에르(Gui de Dampierre)에 맞서 부유한 플랑드르 도시 파트리시계급을 지원했다.
잉글랜드와의 기엔 분쟁과 플랑드르 전쟁
1286년 에드워드 1세는 아키텐 영지에 대해 신임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의 예(hommage)를 바쳤다. 그러나 1296년 어업 분쟁을 계기로 새로운 난관이 발생했다. 노르만 선원들(노르망디는 더 이상 잉글랜드 영토가 아니었다)과 가스코뉴·잉글랜드 선원들 사이에 실제 해전이 벌어졌다.
1293년 초 필리프는 에드워드를 소환했다. 스코틀랜드 문제로 바빴던 잉글랜드 왕은 동생을 프랑스로 파견하고, 기엔 점령을 비롯한 종주국의 조건을 수락했으나, 필리프가 다시 소환하자 5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두 왕국은 전쟁 준비를 하며 동맹국과 보조금을 구했다. 1294년 잉글랜드 왕은 전년도부터 콩스탕블 드 네슬(Connétable de Nesle)이 점령 중이던 기엔에 군대를 파견했다. 분쟁은 장기화되었다.
몽트뢰유 조약과 플랑드르의 고립
1297년 플랑드르 백작 기 드 당피에르는 프랑스 국왕에게 바쳐야 할 충성을 비난하며 에드워드와 동맹을 맺었다. 1298년 8월 13일 퓌르네(Furnes) 전투에서 로베르 다르트와(Robert d'Artois)가 플랑드르군을 격파하고 릴(Lille)이 항복하자, 교황의 중재로 에드워드·필리프·플랑드르 백작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1299년 6월 몽트뢰유 조약(Treaty of Montreuil)은 전년도 조치를 확정했다.
에드워드는 보르도를 제외한 기엔을 되찾았다. 그는 필리프의 누이 마르그리트(Marguerite)와 결혼하고, 당초 플랑드르의 필리피네(Philippine)와 약혼했던 아들은 프랑스의 이자벨(Isabelle)과 약혼했다. 젊은 에드워드 2세는 이자벨과 결혼하기 전 1304년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의 예를 바쳤다. 몽트뢰유 조약으로 강력한 동맹을 잃은 기 드 당피에르는 고립되었고, 1300년 1월 국왕의 자비에 몸을 맡겨 콩피에뉴(Compiègne) 거주를 명령받았다. 플랑드르는 프랑스에서 파견된 왕실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고, 총독 기 드 샤티용(Gui de Châtillon)이 그 수장이었다.
브뤼주 조반과 쿠르트라이 전투
1302년 5월 18일 밤, 브뤼주(Bruges) 시민들이 봉기해 프랑스 수비대를 학살하는 '브뤼주 조반(Matins de Bruges)' 사건이 발생했다. 필리프 4세는 보복군을 파견했으나, 7월 11일 쿠르트라이(Courtrai, 금박장 전투)에서 플랑드르 민병대에게 궤멸당했다. 국왕이 친정하여 2년 후인 1304년 8월 10일 몽생페벨(Mons-en-Pévèle)에서 설욕했으나, 전쟁은 계속될 조짐이 보여 가을에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1305년 6월 23일 아티쉬르오르주 조약(Treaty of Athis-sur-Orge)으로 회담이 마무리되었다.
플랑드르 문제의 미해결
기 드 플랑드르가 사망하자 아들 로베르 드 베튄(Robert de Béthune)이 플랑드르 백작이자 프랑스 귀족이 되었다. 주요 요새 도시 성벽 철거, 거액의 배상금 지급, 여러 플랑드르 도시 점령(조약 이행까지) 등 가혹한 조건이 부과되었으나, 프랑스에 대한 반발과 소요는 지속되었다. 1309년 수정된 아티쉬 조약도 이행되지 않았고, 1310년 9~10월 투르네(Tournai)의 결실 없는 회담 끝에 '플랑드르 이양(Transport of Flandre)'으로 알려진 합의가 퐁투아즈(Pontoise)에서 체결되었다. 국왕은 담보로 잡고 있던 릴·두아이·베튄을 영구히 귀속시켰다. 그러나 백작은 여전히 도시 요새 철거를 거부했고, 1313년 여름 새로운 전쟁을 앞두고 후방 소집(ban et arrière-ban)이 내려졌다. '아름다운 왕(le biau roi)'이 죽을 때까지 플랑드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왕실령의 성공적 확장
필리프 르 벨은 다른 방면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284년 나바르의 잔(Jeanne de Navarre)과 결혼한 후, 그는 아내 명의로 샹파뉴와 나바르를 통치하며 나바르 국왕·샹파뉴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 이듬해 프랑스 국왕이 되자, 우리 왕들 중 최초로 나바르 국왕 칭호를 유지하고 샹파뉴 백작 칭호는 포기했으나 백작령 통치권은 보류하여 왕권의 샹파뉴 침투를 완성했다.
1305년 4월 4일 잔 드 나바르 사후, 왕세자 루이가 샹파뉴 백작 칭호를 계승했으나 필리프는 통치권을 유지했다. 또 다른 신하인 바르 백작 앙리 3세(Henry III)는 잉글랜드 왕과 동맹했다가 1297년 포로가 되었고, 1301년 브뤼주 조약으로 뫼즈 강 좌안 영지(이동 바루아, Barrois mouvant)를 필리프에게 양도해야 했다. 1292년부터 왕실 종주권 하에 있던 발랑시엔(Valenciennes)에 이어, 1313년 몰수된 투르네(Tournai) 카스텔라니도 왕령에 편입되었다. 더 남쪽에서는 12세기부터 필리프 르 벨의 선대 왕들이 여러 차례 개입했던 리옹(Lyon)이 1307년 협정(필리피누스, philippines)과 1312년 협정으로 왕실 종주권하에 들어갔다.
그 밖의 필리프 치세 획득지로 1286년 양도받은 샤르트르 백작령, 1293년 매입한 몽펠리에 영주권, 보장시(Beaugency) 영주권, 위그 13세 드 뤼지냥(Hugues XIII de Lusignan)의 자매이자 상속녀들이 가진 라 마르슈(La Marche)·앙굴렘(Angoulême) 백작령 권리, 1306년 양도받은 술(Soule)·마울레옹(Mauléon) 자작령, 1292년 압류된 비고르(Bigorre) 백작령, 비비에(Viviers) 주교령에 속한 여러 영토 등이 있다.
아팡주 분봉
반면 관례에 따라 필리프는 형제들과 아들들에게 아팡주(appanage)를 분봉했다. 동생 샤를(Charles)은 앙주(Anjou)·메인(Maine) 백작령을 소유하고 부친으로부터 발루아(Valois) 백작령을 이미 받았는데, 1293년 샤르트르·알랑송(Alençon)·페르슈(Perche) 백작령과 스농슈(Sénonches)·티므레(Thimérais) 카스텔라니를 추가로 받았다. 필리프 3세와 마리 드 브라반트(Marie de Brabant)의 아들 루이(Louis)는 1298년 에브뢰(Évreux) 백작령과 보몽르루아(Beaumont-le-Roger)·뮐랑(Meulan)·에탕프(Étampes)·두르당(Dourdan)·라 페르테알레(La Ferté-Alais) 영주령을 받았다. 국왕의 차남이자 미래의 필리프 5세인 필리프(Philippe)는 1313년 푸아티에(Poitiers) 백작령 일부를, 미래의 샤를 4세인 샤를(Charles)은 모친으로부터 1293년 비고르 백작령을 받고 라 마르슈 백작령을 아팡주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