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찬디 보로부두르: 자바의 위대한 불교 성지

이름의 유래와 의미

인도네시아의 고대 사원을 '찬디(Candi)'라고 부른다. 따라서 보로부두르 불교 기념물도 '찬디 보로부두르'로 불린다. 자바어에서 '찬디'는 고대 문과 목욕탕 구조물을 뜻하기도 한다. '보로부두르(Borobudur)'라는 명칭의 정확한 유래는 불분명하다. 이 이름은 영국 역사가 토머스 래플스 경이 1817년 저서 <자바의 역사(History of Java)>에서 처음 언급했으나, 그 이전의 비문이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1365년에 작성된 탈라파트라(야자수 잎 문서) '나가라케르타가마(Nagarakretagama)'에는 '부두르(Budur)'라는 이름이 '신성한 불교 예배처'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마자파히트 왕국의 학자 음푸 프라판차(Mpu Prapanca)가 썼다. 래플스가 이 기록을 바탕으로 '보로 부두르'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어원설이 존재한다. '보레-부두르(Bore-Budur)'의 와전으로 '보레 마을 근처의 부두르(불교) 사원'을 뜻한다는 설, 자바어 어순대로라면 '부두르보로(Budurboro)'가 되어야 한다는 설, '부두르'가 자바어 '붓다(Buddha)'에서 왔다는 설, '부다라(Bhudhara, 산)'에서 유래했다는 설, '부다 우르(Buddha Uhr)' 즉 '불교 사원(비하라)'의 와전이라는 설, '비라 베두후르(Wira Beduhur)'의 오독이라는 설 등이 있다. 카스파리스(Kasparis)는 본래 이름이 산스크리트어 '부미 삼바라 부다라(Bhumi Sambhara Bhudhara)'로 '보살의 십지(十地) 덕성을 갖춘 산'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건립과 봉헌

보로부두르의 건립과 봉헌에 관한 두 비문이 텡아(Tenggang) 리젠시의 크두(Kedu)에서 발견되었다. 824년 카윔와웅안(Kayumwungan) 비문에는 삼라퉁가 왕의 딸 쁘라모다와르디니(Pramodavardhini)가 '지나야(Jinalaya, 세속적 욕망을 정복한 자들의 경지)'라는 종교 건물을 봉헌했다고 적혀 있다. 같은 해 뜨리뜨리푸산(Tri Tepusan) 비문에는 그녀가 '까훌루난(Kahulunnan)'이라는 이름으로 부미삼바라(Bhumisambhara)라는 '까물란(Kamulan, 기원의 장소)'에 세금 면제 토지를 하사해 유지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샤일렌드라 왕조와 연관된 조상 숭배 성소였음을 시사한다.


보로부두르, 파본, 멘둣의 미스터리

보로부두르는 욕야카르타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수라카르타에서 86km 떨어진 고지대에 위치한다. 쌍둥이 화산 순도로-숨빙(Sundoro-Sumbing)과 메르바부-메라피(Merbabu-Merapi) 사이, 프로고(Progo)와 엘로(Elo) 강 사이에 자리 잡은 이 지역은 '크두 평야'로 불린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크두 평야는 자바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 중 하나이며, 농업 생산성이 높아 '자바의 정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20세기 복원 작업 중 보로부두르, 파본(Pawon), 멘둣(Mendut) 세 불교 사원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종교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배치되었으리라 추측되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세계 여러 곳에서 비슷한 직선 배열의 피라미드들이 발견되는데, 일부에서는 이를 외계 문명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호수 위에 떠 있던 연꽃

보로부두르는 해발 265m 호수 속에 솟은 49피트 높이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 이 고대 호수의 존재는 20세기 초 고고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1931년 네덜란드 건축학자 W.O.J. 니우웬캄프(Nieuwenkamp)는 '크두 평야가 과거 호수였고, 보로부두르가 연꽃처럼 물 위에 떠 있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건립 시기는 사원의 부조 문양과 8~9세기 왕실 그릇 양식을 비교해 8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는 중부 자바에서 760~830년 전성기를 구가한 샤일렌드라 왕조 시기와 일치하며, 스리위자야 왕조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공사 기간은 약 75년으로, 825년경 삼라퉁가 재위 중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힌두와 불교 왕조의 공존과 갈등

자바의 힌두·불교 왕조사는 복잡하다. 샤일렌드라 왕조는 독실한 불교 왕조로 알려졌으나, 쏘조메르또(Sojomerto) 비문에서는 힌두교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크두 평야 인근 평원과 산지에 힌두 사원과 불교 기념물이 동시에 건립되었다. 720년 시바교 왕 산자야(Sanjaya)는 보로부두르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우키르(Wukir) 언덕에 시바 프람바난(Prambanan) 사원 건립을 시작했다. 일부 학자들은 산자야의 후계자 라카이 피카탄(Rakai Pikatan)이 불교도들의 사원 건립을 허용했기 때문에 보로부두르를 비롯한 불교 사원들이 세워질 수 있었다고 본다. 778년 깔라산(Kalasan) 비문에는 피카탄이 불교도에 대한 존경으로 깔라산 마을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힌두 왕이 불교 기념물 건립을 도운 점이 자바에 심각한 종교 갈등이 없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당시 샤일렌드라(불교)와 산자야(시바교) 두 왕조가 대립했으나, 856년 라뚜 보코(Ratu Boko) 궁전을 둘러싼 전쟁 전까지는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다. 프람바난 단지의 라라 종그랑(Lara Jonggrang) 사원을 두고도 해석이 갈린다. 샤일렌드라를 정복한 피카탄이 보로부두르에 대항해 지었다는 설, 혹은 샤일렌드라 공주 라라 종그랑이 산자야 왕조의 왕비로 들어와 시바 사원 건립에 참여했다는 평화적 공존설이 맞선다.


망각 속으로 사라진 보로부두르

928~1006년 메라피 화산의 연이은 분화로 마타람(산자야) 왕조의 음푸 신독(Mpu Sindok) 왕이 수도를 동부 자바로 옮기면서 보로부두르 지역은 인적이 끊겼다. 사원은 화산재와 숲에 묻혀 수세기 동안 잠들었다. 1365년 음푸 프라판차의 <나가라케르타가마>에 '부두르의 비하라'라는 모호한 언급이 마자파히트 시대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인적에서 사라진 후에도 민담과 전설 속에서 사원은 살아남았다.

14세기 힌두 왕조가 몰락하고 자바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섬의 모든 건축 활동이 중단되었다. 대다수가 무슬림이 되었고, 남은 불교도들은 발리나 인도로 피신했다. 보로부두르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후 자바는 수많은 정치적 격변과 정권 교체를 겪었다.

18세기 자바 연대기 '바밥(Babad)' 두 편에 이 기념물과 관련된 불운담이 전해진다. <바밥 타나 자위(Babad Tanah Jawi)>에는 1709년 마타람 왕 '파쿠부워노 1세'에 반기를 든 '마스 다나'가 '레디 보로부두르' 언덕에서 포위되어 패배하고 처형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밥 마타람(Babad Mataram)>에는 1757년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왕세자 '몬초나고로(Monconagoro)'가 출입 금지된 스투파 속에 숨어 들어갔다가 이튿날 병들어 죽었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 1976년 작가 소크모노(Sokmono)는 15세기 자바인들이 이슬람을 수용한 뒤 사원이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세속적 믿음을 기록했다.


영국에 의한 재발견

1811~1816년 자바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하에 있었다. 자바 총독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 중위는 자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유적 조사와 현지인 면담을 통해 <자바의 역사>를 집필했다. 그의 재임 중 수많은 고대 유적이 발굴되었다. 1814년 스마랑(Semarang) 순찰 중 부미세고로(Bumisegoro) 마을 근처 숲속에 대형 유적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엔지니어 H.C. 코넬리우스(Cornelius)에게 조사를 맡겼다. 코넬리우스와 200명의 인부가 숲을 베어내고 풀을 태워 밭처럼 정리했으며, 화산재에 묻힌 보로부두르를 발굴했다. 붕괴 위험으로 대규모 발굴은 하지 못했으나, 래플스는 이 유적을 세상에 알린 공로로 '재발견자'로 인정받는다.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보호

1816년 래플스가 떠나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자바를 접수해 '동인도 식민지'로 삼았다. 크두 행정관 하르트만(Hartmann)은 코넬리우스의 작업을 이어받아 1835년 전체 단지를 발굴해냈다. 그는 메인 스투파에서 대형 불상을 발견했으나 문헌 작업은 남기지 않았다. 1842년 메인 돔을 발견했으나 상세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네덜란드 정부는 기술자 F.C. 윌슨(Wilson)과 J.F.G. 브루문트(Brumund)에게 유적 연구를 의뢰했다. 윌슨은 수백 장의 부조 스케치를, 브루문트는 해설문을 작성했다. 1859년 브루문트의 작업이 끝났으나 출판 협조 거부로, C. 리만스(Leemans)가 윌슨의 도면과 브루문트의 자료를 바탕으로 논문을 썼다. 1873년 <보로부두르 예비 연구>가 영어로, 이듬해 프랑스어로 출간되었다. 1873년 네덜란드-플랑드르 역사가 이시도르 반 킨스베르겐(Isidore van Kinsbergen)이 최초의 사진을 찍었다.

점차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세계 연구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1882년 문화재 수석 검사관이 유적 상태가 약하다며 부조들을 박물관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자, 고고학자 그륀벨트(Groenveldt)가 조사한 결과 '우려가 부당하다'며 현지 보존을 권고했다.


세계로 흩어진 공예품

유명해지자 내외국인들이 기념물 조각과 예술품을 기념품으로 훔치기 시작했고, 식민 정부의 묵인 하에 반출되기도 했다. 1886년 샴(태국) 왕 쭐라롱껀(Chulalongkorn)이 자바를 방문해 일부 유물을 요청, 수레 8대 분량을 가져갔다. 이 중 30여 개의 기둥 부조, 5구 불상, 2구 사자상, 비얄라 मुख 프라날(Vyalamukha Pranala), 계단·문 장식, 드바라팔라(Dvarapala)상 등이 방콕 국립박물관 자바 미술실에 전시되어 있다.


보로부두르 사원의 복원 역사

1885년 욕야카르타 고고학회장 예르만(Yzerman)이 보로부두르 기단부에 숨겨진 '감춰진 발(히든 풋)'을 발견했다. 여기에 새겨진 160점의 부조는 <가마수트라(Kamasutra)> 등 세속적 욕망(카마다투)을 묘사한다. 부조 틀에는 조각가들의 지시문도 적혀 있었다. 실제 기단 위 덧씌운 테두리(프린지)의 목적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산사태 시 기단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설, 고대 인도 바스투 샤스트라(Vastu Shastra) 원칙에 어긋난 기단 결함을 숨기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1890년 네덜란드 정부는 브란데스(Brandes, 미술사학자), 테오도르 반 에르프(Theodoor van Erp, 군공병), 반 데 카머(Van de Kamer, 공공사업부 기사)로 3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1902년 세 가지 안을 제출했다. 1안은 모서리 복구, 난간 보강, 창·아치·스투파·주탑 복원으로 긴급 사고 예방(예산 48,800 길더). 2안은 셀라 제거, 배수 개선, 지붕·스투파 수리. 3안은 완전 해체 후 재조립(비용 과다로 채택 안 됨).

1907~1911년 반 에르프 주도로 1안이 실행되었다. 첫 7개월간 주변 발굴로 불상 두상과 기둥석을 수습했다. 이후 상부 원형 테라스 3단과 스투파를 해체·재조립했다. 추가 문제 발견으로 34,600 길더 예산이 더 투입되었다. 주탑 정상 차트라(삼단 우산) 복원을 시도했으나 원석 부족과 원형 불명으로 중단, 철거된 차트라는 현재 북쪽 몇 백 미터 떨어진 카르마위방가(Karmawibhangga)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복원은 주로 조각 청소에 집중되었고 배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콘크리트 사용으로 알칼리염과 수산화칼슘이 용출되어 15년 만에 회랑 벽이 기울고 부조에 균열이 생겼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1945~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복원이 중단되었고, 풍화와 배수 불량으로 석재 변위와 지반 침하가 가속화되어 1950년대엔 붕괴 위기에 처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가 유네스코에 도움을 요청했다. 1968년 고고학국장 소크모노 교수 주도로 '보로부두르 보존 캠페인'과 대규모 복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 정부의 국제 사회 호소에 호주, 벨기에, 키프로스, 프랑스, 독일이 자금을 지원했다. 1975~1982년 인도네시아 정부와 유네스코는 100만 개 넘는 석재를 해체·분류·세척·보존 처리하고, 미생물 제거를 위해 살충 처리했으며, 기초를 보강하고 1,460개 전 기둥을 청소했다. 5개 방형 테라스 재조립과 배수 시스템 전면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600여 명이 투입되어 총 6,901,243달러가 소요되었다. 완공 후 199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현재 순례자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종교 의식

유네스코 주관 대복원 이후 보로부두르는 다시 순례지와 예배처로 기능한다. 매년 5~6월 보름(웨삭, Vesak) 인도네시아 불교도들은 석가모니의 탄생·열반·성도를 기념하는 웨삭 축제를 연다. 이 날은 국경일이며, 멘둣→파본→보로부두르 순으로 행렬 의식이 거행된다.


폭탄 테러

1985년 1월 21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으로 9발의 폭탄이 터져 스투파 9기가 심하게 파손되었다. 설교자 후세인 알리 알 하브시(Husein Ali Al Habsyi)에게 종신형, 실행범 2명에게 징역 20년, 공범 1명에게 징역 13년이 선고되었다.


관광객 증가

보로부두르는 인도네시아 최대 관광 명소다. 1974년 26만 명(외국인 3만 6천), 1990년대 중반 경제 위기 전 연 250만 명(내국인 80%)까지 증가했다.


자연재해와 보존

지진: 2006년 5월 27일 중부 자바 남부 해안 규모 6.2 지진으로 욕야카르타 일대 큰 피해가 났으나 보로부두르는 무사했다.

메라피 화산 폭발(2010): 28km 남서쪽 메라피 산 폭발로 화산재가 사원을 덮쳤다. 11월 3~5일 불상 위에 2.5cm 재층이 쌓였고, 5~9일 폐쇄 후 청소했다. 유네스코가 복구비 300만 달러 지원. 배수관에 찬 화산재 제거를 위해 석재 5만 5천여 개를 다시 해체하는 데 약 1년 소요.

독일 보존 작업(2012~): 2012년 1월 독일 전문가 2명이 10일간 정밀 진단, 6월 2차 복원비 13만 달러 지원 약속. 10월 석재보존·미생물학·구조·화학공학 전문가 6명이 1주일 재조사 후 보수 작업 재개. 2012년 6월 '세계 최대 고고학 유적'으로 기네스북 등재. 2014년 8월 계단에 목재 덮개 설치해 원석 마모 방지.

클루트 산 폭발(2014): 2월 13일 욕야카르타 동쪽 200km 클루트 산 폭발로 화산재 영향권에 들어 보로부두르, 프람바난, 라뚜 보코 등 주요 관광지 일시 폐쇄. 주요 스투파와 불상 덮개로 보호.

ISIS 위협(2014): 8월 ISIS 인도네시아 지부가 소셜미디어로 보로부두르 등 조각상 파괴 예고. 경찰·군경 경계 강화, CCTV 설치, 야간 경비 증강.


자바 건축 기념물로 지정

인도인 불교도·힌두교도들이 이 유적을 알고 언덕 위 건축을 많이 했으나, 인도네시아 무슬림 정부는 이곳에서 힌두·불교 성지 구조물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힌두·불교 유적이 아닌 '자바 지역 문화 기념물'로 지정했다.


불교 차이티야와 기념물의 원형

보로부두르는 거대한 스투파 형태로, 위에서 보면 거대한 밀교 불교 만달라 같다. 불교 우주론과 마음의 본성을 형상화했다. 기초는 변변 길이 118m 정방형. 9층 구조: 하부 6층 방형, 상부 3층 원형. 최상층 중앙 대스투파 주위에 종형 소스투파 72기가 장식 구멍을 뚫고 둘러서며, 내부엔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형태는 피라미드에서 영감받았다. 서부 자바의 선사 시대 오스트로네시아 거석 문화 유적인 푸르덴 베룬닥(Punden Berundak), 팡구양안(Pangguyangan), 치솔록(Cisolok), 구눙 파당(Gunung Padang) 등에서 계단 피라미드 구조가 발견된다. '산과 높은 곳에 조상신(히앙)이 깃든다'는 토속 신앙이 석조 피라미드 축조 배경이다. 보로부두르 기본 구조는 푸르덴 베룬닥 피라미드에서 영감받고, 마하야나 불교 사상·상징과 융합된 석조 전통의 확장으로 이해된다.


보로부두르 사원의 영적 의미

기념물 3부분은 상징적으로 삼계(三界)를 나타낸다. 하부 기단=가마다투(Kāmadhātu, 욕망계), 중부 5방형 층=루파다투(Rūpadhātu, 색계), 상부 3원형 층과 주탑=아루파다투(Arūpadhātu, 무색계). 범부는 욕망계에 머문다. 욕망을 극복하면 색계로 올라가 형상은 보이나 욕망하지 않는다. 마침내 무색계에서 완전한 불성(佛性)을 깨달아 윤회를 초월한다. 공(空)과 동일시하며 세속적 형태에 집착하지 않는 경지다.

건축적 특징도 위계에 따라 변한다. 색계의 방형과 화려한 장식은 무색계의 단순한 원형 층에서 사라지며, '이름과 형태(나마루파)'에 매인 세계에서 '형상 없는 세계'로 전환됨을 보여준다.

순례 동선은 수행 여정을 은유한다. 계단과 회랑이 정상으로 인도하며, 각 층은 깨달음의 단계를 상징한다. 순례길은 불교 우주론을 공간화한다. 1885년 우연히 발견된 감춰진 기단 부조 160점은 욕망계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조각가 지시문도 남아 있다.


504구 불상

보로부두르에는 다양한 불상이 있다. 5방형 테라스(색계)와 상부 테라스(무색계)에 연화좌(팔마사나) 불상이 배치된다. 색계에서는 난간 밖 열에 불상이 줄지어 서 있다. 층이 올라갈수록 불상 수 감소: 1층 104구, 2층 88구, 3층 72구, 4층 72구, 5층 64구. 색계 합계 432구. 무색계(3원형 테라스)에서는 스투파 내부에 불상 안치: 1단 32기, 2단 24기, 3단 16기, 총 72기. 원래 504구 중 300구 이상 파손(대부분 두상 실종), 43구 실종. 발굴 전 도굴꾼들이 두상을 훔쳐 서구 박물관에 팔았다. 암스테르담 트로펜 박물관, 런던 대영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멀리선 비슷해 보이나 수인(手印, 무드라)이 다르다. 5방향(북·동·남·서·정수리) 5그룹 수인. 이는 마하야나 5방위 지불(智佛)을 상징한다. 하부 4테라스엔 4방위 수인(북·동·남·서) 각 방위 대응. 5테라스와 상부 72스투파 불상은 정수리 수인(법계체성인) 통일. 각 수인은 5지불(五智佛) 중 하나를 대변하며 각기 다른 영적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