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은 '일시적 해결책'이라던 당시의 기대
1947년 6월 3일, 인도 국민회의 노동위원회는 마운트배튼 계획을 수용하면서 인도 분할을 일시적인 해결책으로 규정했습니다. 증오의 폭풍이 가라앉으면 인도의 문제를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그때 '두 민족 이론'이라는 허구는 모든 이들에게 거부당할 것이라는 희망이 깔려 있었습니다.
진나가 카라치로 떠난 뒤 사르다르 파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슬림들은 인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들의 종교적 성지와 중심지도 모두 인도에 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머지않아 그들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파키스탄 건국 후에는 마하리시 아우로빈도가 "인도는 다시 하나로 통합될 것이다. 이 분단은 부자연스러우며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간디 역시 "파키스탄이 인도에서 분리된 것은 한 식구가 집을 나가 자기 집을 따로 꾸린 것과 같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파키스탄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지, 그들을 원래 가족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아크한드 바라트의 꿈, 그리고 70년 넘게 이어진 적대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서로 다른 두 국민으로 규정해 온 힌두트바 세력 역시 파키스탄 건국 이후 '통일 인도(아크한드 바라트)' 재건의 꿈을 품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를 짓눌러 온 독기 어린 분위기를 보면, 아크한드 바라트 재건이 현실이 되거나 양국 사이에 진정한 우호 관계가 꽃피우기는 요원해 보입니다.
분단 당시 존재했던 양국 관계 악화의 원인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증오와 불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키스탄 정치인들은 인도와 파키스탄 국민 사이의 이 영속적인 증오를 '만기되지 않고 몇 번이고 현금화할 수 있는 수표'처럼 요긴하게 활용해 왔습니다.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후세인 하카니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공유된 유산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파키스탄의 존립 기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파키스탄을 별개의 국가로서 정체성을 지우려는 음모로 간주되었다."
'하나로 묶자'에도, '따로 살자'에도 반대하는 기묘한 역설
기묘한 아이러니가 여기 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을 하나로 묶어 이해하거나 설명하려 하면 양쪽 모두에서 반발이 일어나고, 반대로 두 나라를 구분하려 해도 역시 양쪽 모두의 반대에 부딪힙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자와할랄 네루의 입장은 비교적 분명했습니다. 1948년 1월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네루는 파키스탄에 이렇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별개의 국가라는 점에 대해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만약 오늘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인도와 파키스탄을 재통합할 기회를 얻는다면 나는 즉각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나는 문제투성인 파키스탄의 짐을 짊어질 생각이 없으며, 내 나라에도 이미 풀어야 할 문제가 많다. 어떠한 긴밀한 협력이라도 정상적이고 우호적인 방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파키스탄이 하나의 국가로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도 참여할 수 있는 더 큰 연방 안에서 대등한 동반자가 되는 방식이어야 한다."
하카니가 지목한 네루와 파텔의 책임
하카니는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우의가 싹트지 못한 데 대해 네루와 파텔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영국의 지시에 따라 이 대륙이 분열되었다는 비난의 빌미를 파키스탄 쪽에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파텔은 파키스탄이 별개의 국가로 생존할 가능성에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하며, 조만간 우리 국가에 굴복해 다시 합쳐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분명히 아크한드 바라트를 향한 신호였습니다.
파텔은 1950년 12월 세상을 떠나기 전 인도 국민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어머니 인도의 생명 기관이 잘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떤 보장도 파키스탄 지배층의 불안을 달래지 못했습니다. 파키스탄 지도부는 끝내 인도의 최종 전략 목표가 파키스탄의 재통합이라고 믿었습니다.
인도에서 온 이주 지도자들이 강화한 '두 민족 이론'
하카니는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온 지도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었습니다. "새 국가의 지휘봉을 잡은 많은 지도자들은 인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 출신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파키스탄이라는 개념을 더욱 강경하게 내세웠고, 자신과 이 나라를 쉽게 연결하려 했다. 그들은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끝없는 갈등, 그리고 두 민족 이론을 특별히 강조했다."
하리야나의 작은 번왕국 출신이었던 리아카트 알리 칸 총리는 파키스탄만이 이슬람적 실천을 실현하고 무슬림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인도에서 온 다른 각료들도 똑같은 견해를 밝혔고, 잘란다르 출신 행정 서비스 수장 차우드리 무함마드 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카니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파키스탄을 이슬람의 요새로 규정하고 '힌두 인도'와 '무슬림 파키스탄'을 분리하는 것은, 우파, 델리, 봄베이, 콜카타 같은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도시가 전혀 없는 나라로 떠나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편리한 방법이었다."
현지인들의 비판: 외지인 지도부에 대한 반감
신드의 저명인사였던 굴람 무르타자 사이드는 자신의 주로 대거 유입된 외지인들을 비판했습니다. 분단 후 피신해 온 이 낯선 이들은 펀자브어와 우르두어를 쓰는 무하지르(이주민)들로, 정작 신드어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파슈툰 지도자 압둘 가파르 칸 역시 일반 파키스탄 국민을 통치 아래 묶어 두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폭동, 공격, 지하드에 얽어 매는 지도자들을 비난했습니다.
핵 보유국 간의 '냉전', 그리고 반복되는 악순환
후세인 하카니는 인도-파키스탄 관계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양국이 서로에게 직접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때조차, 핵무장을 한 두 나라는 냉전식으로 서로 맞서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양국 지도자들은 국제회의의 가장자리에서 만나 공식 차원의 대화 재개를 발표해 왔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파키스탄 내 지하드 단체와 연결된 테러가 인도에서 발생해 대화 분위기를 깨뜨리거나, 잠무·카슈미르의 실질 통제선(LoC)을 따라 휴전 위반 혐의가 제기되곤 한다."
분단의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세대를 넘어 증폭되고 있습니다. '우호'라는 단어가 양국 관계에서 여전히 먼 이야기로 남아 있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