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윌리엄 월리스: 잉글랜드에 맞선 스코틀랜드 독립 영웅 '브레이브하트'

윌리엄 월리스 경(Sir William Wallace, 1270년경~1305년)은 '브레이브하트'라는 별명으로도 널리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애국자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긴다리 에드워드')의 노르만 지배에 맞서 민중을 이끈 인물입니다. 그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은 잔 다르크 혹은 스파르타쿠스와 비견될 만하며, 실존 인물로서의 역사적 사실은 전설적인 서사와 뒤섞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출신과 유년기

대중의 눈에 월리스는 '평민 출신의 인물'로 비쳤으며, 고귀한 귀족 가문 출신인 동료 로버트 더 브루스(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월리스의 가문은 하급 귀족으로, 스튜어트 가문(훗날 왕가가 됨) 초기 인물의 가신이었던 지주 리처드 월리스(Richard the Welsh)의 후손이었습니다.

월리스는 1270년경 에어셔 킬마녹의 엘러슬리(Ellerslie)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어, 1297년부터 1305년까지 이어진 그의 전성기에도 여전히 젊은 나이였습니다. 다만 그의 출생지를 두고는 논란이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문서들은 월리스를 렌프루셔의 엘더슬리(Elderslie)와 연결 짓는데, 이는 당시 언어가 아직 표준화되지 않아 문서상 오기가 드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대 기록들을 근거로 볼 때 월리스가 에어셔 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에어셔 리카튼 출신이었고 어머니 역시 에어셔 라우든 출신이었으며, 그의 첫 전투들도 에어셔에서 벌어졌습니다.

월리스 생애 초반에 관한 동시대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역사가들은 그가 태어난 지 약 2세기 뒤인 1470년경에 쓰인 '맹인 해리(Blind Harry)'의 기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에어셔에서 태어났고, 리카튼의 말콤 월리스 경의 아들이며, 말콤과 존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구전으로, 때로는 문자로 전해진 매우 단편적인 정보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월리스의 유년기는 일종의 신화나 다름없습니다.

월리스는 숙부에게 교육을 받았고, 당시 기준으로 잘 교육받은 인물이 되어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맹인 해리는 월리스가 국외를 방문했거나 1297년 이전에 군사 경험을 쌓았다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1296년 퍼스에서 도둑질을 한 '윌리엄 르 월레이스(William le Waleys)'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하나 전해집니다.

월리스 시대의 스코틀랜드

월리스가 태어날 무렵, 스코틀랜드 왕 알렉산더 3세는 이미 20년간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재위는 평화와 경제적 안정의 시기였으며, 끊임없이 이어지던 잉글랜드의 종주권 요구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1286년, 알렉산더 3세는 거센 폭풍 속에서 말을 달리다 추락해 사망했고, 살아남은 자식은 없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그의 4세 된 손녀 마거릿을 여왕으로 선포하고, 그녀가 친정할 나이가 될 때까지 나라를 다스릴 섭정 체제를 세웠습니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이러한 불안정성을 틈타 귀족들과 버그햄 조약을 체결하여,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와 마거릿의 혼약을 조건으로 스코틀랜드가 독립 국가로 남는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마거릿은 1290년, 고향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도중 8세의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곧바로 열세 명이나 등장했습니다.

통념과 달리 존 발리올은 왕위 계승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편향 논란을 피하기 위해 중립적인 중재자를 원했고, 무모하게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에게 판결을 요청했습니다. 에드워드는 공정한 중재자로서가 아니라 대군을 이끌고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에 도착해, 자신은 봉신국의 분쟁을 조정하러 온 영주이며 모든 왕위 주장자들이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각각의 서약을 확인한 뒤 에드워드는 1292년 발리올을 '봉신국 스코틀랜드'의 통치자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1296년 3월, 발리올은 서약을 파기했습니다.

월리스의 활약 (1297~1298)

월리스는 래너크의 잉글랜드 보안관을 암살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이 죄로 그는 법 밖의 자, 즉 무법자로 몰려 숲으로 피신했고, 곧 30명 남짓한 동료들이 그에게 합류하여 함께 래너크의 잉글랜드 수비대를 몰살시켰습니다(1297년 5월). 이것이 반란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대귀족들도 그에게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더글러스는 그의 부관이 되었고,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샤트는 제임스 스튜어트를 진영으로 끌어들였으며, 이윽고 젊은 로버트 브루스도 합류함으로써 브루스 가문에 붙어 있던 친잉글랜드 성향이라는 평판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1297년 8월, 월리스는 군대를 이끌고 던디를 포위했습니다. 서리 백작과 재무관 휴 크레싱엄이 이에 대응해 병력을 스털링에 배치하면서, 월리스군의 후방을 차단했습니다.

스털링 다리 전투

월리스는 포위를 풀고 스털링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도착했을 때 잉글랜드군은 이미 견고하게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고 수적으로도 크게 우세했습니다. 보병 1만 5천과 기병 1천 대 스코틀랜드의 보병 4천과 기병 180. 상황은 스코틀랜드에게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를 서두르려던 한 잉글랜드 기사의 경솔함이 상황을 뒤집는 계기가 되었고, 잉글랜드군은 기사 100명 이상을 포함해 3천 명을 잃으며 참패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승리는 눈부셨습니다.

도시들은 잇달아 성문을 열었습니다. 애버딘이 잠시 저항한 것을 제외하면 던디, 퍼스, 스털링, 에든버러, 록스버러, 버릭이 모두 항복했습니다. 월리스는 곧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호자'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컴브리아와 노섬벌랜드까지 이르는 원정을 벌이는 한편, 자신의 권력 아래 있는 영토에 질서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직접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플랑드르인들을 지원하며 프랑스와 대치하던 대륙 전역을 잠시 내려놓고 스코틀랜드 장악에 나섰습니다. 1298년 7월 버릭을 탈환한 데 이어 록스버러도 함락시켰고, 마침내 월리스의 퇴로인 폴커크를 차단했습니다. 1298년 7월 22일, 스코틀랜드군은 폴커크에서 궤멸적인 패배를 당해 2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이로써 월리스의 영웅담은 막을 내렸습니다.

말년

월리스는 왕국 수호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무법자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잠시 프랑스에 머물렀다가 1303~1304년 스코틀랜드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무법자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그는 글래스고에서 체포되어, 주군에 대한 배반죄와 각종 범죄, 성역 모독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305년 8월 23일, 그는 런던에서 능지처참형(교수형·거열형·사지 분지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향년 35세였습니다.

죽음 이후

1314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한 로버트 더 브루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배녹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대파했습니다. 이 전쟁의 끝에서 스코틀랜드는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고, 1328년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