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7년 선거에서 인도 국민회의(Congress)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진나(Jinnah)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힌두교 정당인 국민회의에 강력히 맞서기 위해서는 인도 내 모든 무슬림 정당을 무슬림 연맹(Muslim League) 아래로 결집시키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진나는 '두 국가론'을 무슬림의 약점으로 삼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기로 결심했고, 인도 정치의 방향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힌두교도들이 무슬림에 대해 자행하는 학대에 관한 거짓 통계와 조작된 사건들을 선전하며 '이슬람이 위험에 처했다'는 도발적 구호를 내걸었고, 무슬림들 사이에 인위적인 공포를 조성해 공동체 갈등 문제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라크나우 역에서의 열광적 환영
진나는 1937년 10월 13일 봄베이에서 라크나우로 향했다. 라크나우 기차역에는 무슬림 연맹 당원들이 그의 객차를 에워쌌다. 그 열정과 힌두의 공격에 맞서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에, 평소 침착하고 동요하지 않던 진나조차 감정이 북받쳤다. 그의 얼굴에는 엄숙한 표정이 어렸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민중이 마침내 일어섰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격앙된 군중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몇 마디 말을 건넸고, 지도자를 직접 마주한 많은 무슬림들은 분노와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반드시 예속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리라고 확신했다.
국민회의 정부에 대한 불만 제기
1937년 선거 결과는 중앙 정부 체제에서 어떤 형태든 힌두교도가 과반수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따라서 무슬림 대중과 여러 무슬림 정당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영국 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계획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진나는 국민회의의 승인 여부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1937년 10월, 국민회의 성립 후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그는 이미 무슬림들이 국민회의 정부로부터 정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데 마타람(Vande Mataram) 노래, 힌디어 장려, 국민회의 깃발에 대한 경례 등을 집요하게 문제 삼았다.
콜카타 연설: "국민회의는 힌두 조직이다"
1938년 4월 중순, 플러드라이트에 환하게 밝혀진 콜카타의 원형극장에서 진나는 외쳤다. '국민회의는 근본적으로 힌두 조직이다. 무슬림들은 종교, 문화, 언어, 혼인법 외에도 자신들에게 생사의 문제가 된 한 가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분명히 밝혀 왔다. 그들의 미래와 운명은 정치적 권리를 얻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국가 생활 속에서, 정부 안에서, 나라의 행정에서 자신들에게 마땅한 몫을 돌려받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마지막 숨까지 싸울 것이다. 힌두 라즈(Hindu Raj)를 세우려는 어떠한 꿈과 구상도 성공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무슬림을 지배할 수 없으며, 아주 작은 힘이라도 남아 있는 한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진나는 국민회의로 하여금 무슬림 연맹을 존중하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게 하는 한편,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는 완전한 자립과 하나로 결속된 단결된 민족으로 움직일 것을 가르치고자 했다.
이크발의 지지와 진나-시칸다르 협약
그 무렵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는 무슬림들에게 자신의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협력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이크발(Iqbal) 박사는 이를 무슬림의 문화적 통일성을 파괴하려는 계획이라 규정했다. 이크발은 진나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그의 중재로 진나-시칸다르 협약(Jinnah-Sikandar Pact)이 체결되면서 펀자브 연합당(Unionist Party) 소속 무슬림 의원들도 무슬림 연맹에 합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벵골에서는 파즐룰 하크(Fazlul Haq)의, 신드에서는 사달라 칸(Sadullah Khan)의 지도 아래 입법의회 소속 무슬림 의원들이 무슬림 연맹의 당적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무슬림 연맹은 강력한 정당으로 성장했다. 같은 시기 연합주(United Provinces)에서 벌어진 내각 구성 관련 논란 역시 무슬림 연맹의 인기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표면적 쟁점들이 부추긴 공동체 갈등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 사이의 불신은 겉보기에는 부차적인 쟁점들에서 비롯되었다. 국민회의의 '삼색기' 게양, '반데 마타람'의 국가 창곡, 연합주(U.P.)에서 우르두어 대신 힌디어 사용을 요구하는 움직임 등이 공동체 간 불화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 진나는 이를 적극 활용해 자신의 리더십과 무슬림 연맹의 영향력을 무슬림들에게 굳건히 각인시켰다. 그 결과 1927년 불과 1,330명에 불과했던 무슬림 연맹의 당원 수는 1938년에는 10만 명으로 늘었고, 1944년에는 200만 명에 달했다.
"유일한 대표 기구" 주장과 지도자들 간의 반목
진나는 무슬림 연맹을 인도 전체 무슬림의 유일한 대표 기구라고 주장했지만, 국민회의는 이를 거부했다. 진나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국민회의가 전인도 단일 정당이 아니며 힌두교도와 무슬림 모두의 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진나는 국민회의 지도부, 특히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에게 끊임없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는 간디를 '마하트마'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교활한 여우, 뱀, 모든 이와 경쟁하는 힌두교도라고 불렀다.
간디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을 어떤 한 가지 입장으로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뱀처럼 교활하다.' 네루에 대해서는 '서양식 교육의 베일로 자신의 술수를 감추는 오만한 브라만. 약속할 때는 어느 한쪽을 저버리고, 방법을 찾지 못하면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라고 평했다.
진나의 행동은 국민회의 지도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간디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진나를 국민회의 운동 안에 붙잡아 두고자 했다. 이처럼 국민회의와 무슬림 연맹 양측 최고 지도자들의 개인적 반목은 인도 공동체주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1938년 4월 네루와 진나 간의 서신 왕래는 두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많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냈다. 진나는 무슬림 연맹이 무슬림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받기를 원했고, 네루는 이를 단지 하나의 공동체 조직으로만 간주할 용의가 있었다. 진나는 국민회의의 행동이 독점적이고 주권적인 기구와 같다고 비난했다.
1938년 4월 12일자 서한에서 진나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무슬림 연맹이 국민회의로부터 완전한 평등의 수준에서 인정받고 힌두-무슬림 협약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내면적 힘에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중요성과 위상을 보여줄 지표가 될 것이다.'
"하나의 국가" 꿈에 대한 비판과 간디 공격
1938년 12월 26일 봄베이에서 행한 연설에서 진나는 국민회의의 '하나의 국가(One-Nation)' 꿈을 강하게 비판하며 국민회의를 순수한 힌두 조직으로 규정했다.
그는 간디를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국민회의 배후에서는 누구의 생각이 작동하고 있는가? 간디 씨의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말한다. 국민회의가 출발 당시의 이념을 파괴한 것은 바로 간디 씨이며, 국민회의를 힌두교 부흥의 도구로 만든 책임 또한 이 한 사람에게 있다. 그의 목표는 힌두 종교를 부흥시키고 이 나라에 힌두 국가를 세우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국민회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힌두적 사고방식과 힌두적 시각이 세심하게 길러지고 있다. …… 무슬림들은 새로운 조건을 받아들이고 국민회의 지도자들의 명령에 따르도록 강요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