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고대 중국의 역사: 황하 문명부터 삼국시대까지

고대 중국의 역사: 황하 문명부터 삼국시대까지고대 중국… 태초부터 그 땅은 황토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황하(黃河)'라 이름 붙인 큰 강의 노란 물이 흘렀지요. 전설에 따르면, 여신 누와(女媧)는 황하 기슭에 앉아 노란 진흙으로 작은 사람들을 빚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불어넣는 손에서 미끄러져 나온 그들이 이 땅에 퍼져 살게 되었고, 그들의 주군은 '황제(黃帝)'라 불리는 황색 군주였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부터 고대 중국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원은 황하 유역 고대 주민들의 주된 생업인 농경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물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땅을 개척하면서 사람들은 운하를 파서 관개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도구를 돌이 아닌 청동과 철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수확량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부싯돌이나 뼈 화살촉 대신 금속 화살촉을 박은 화살, 돌이나 몽둥이 대신 철검은 사냥과 전투에서 훨씬 유용했습니다. 이러한 무기를 통해 이웃의 재산을 약탈하고 외지를 병합할 수 있게 되자, 여러 씨족과 부족 사이에 잦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외부 세력과의 충돌은 읍, 공후, 왕국 같은 국가 형태가 등장한 뒤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

상족은 황하 유역으로 옮겨온 뒤 '은(殷)'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피로 물든 투쟁 끝에 이곳에 먼저 살던 강(羌) 또는 하(夏) 족을 몰아내고 새 땅에 정착했습니다. 상-음의 장로들은 씨족 수령에서 단독 통치자로 변모했고, 백성들 사이에는 신의 명을 받아 권력을 얻은 '천자(天子)'라는 관념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중앙평원이라 불린 황하 유역에서 국가가 형성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중국(中國)', 즉 '중앙의 나라' — 중국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자기 나라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1766년부터 1122년까지 존속한 상-음 국가는 주족의 지배 아래 넘어갔고, 기원전 1122년부터 247년까지 다스린 주의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왕(王)이라 칭했습니다. 그중 첫 번째가 무왕(武王), 즉 '무인(武人) 왕'이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땅과 작위를 나누었는데,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은 유럽의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에 해당하는 위계였습니다. 이웃 부족의 압박과 내부 씨족 귀족의 세력 확장 속에 주 왕국은 여러 영지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시기(기원전 770~403년)를 중국 사람들은 때때로 '춘추(春秋)' 시대라 불렀습니다.

영지의 제후들은 서로 싸웠고, 야만인으로 여겨지던 외부 이웃들과도 충돌했습니다. 춘추시대 뒤를 이어 거의 두 세기(기원전 403~221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격랑이 찾아왔습니다. 일곱 왕국의 군주들은 사투를 벌였습니다. "도시를 함락하기 위한 전투에서는 죽은 자들이 도시를 메웠고, 땅을 다투는 전투에서는 전장이 시체로 완전히 덮였다"고 동시대인은 기록했습니다. 기원전 260년 장평(長平) 전투 후, 진(秦)나라 군대는 조(趙)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 명을 산 채로 매장하기도 했습니다.

진(秦)나라의 통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진나라였습니다. 진의 승리에는 새로운 군대 조직이 한몫했습니다. 공격 부대에는 젊은 병사를, 방어 부대에는 나이 든 병사를 배치한 것이지요.

여섯 경쟁 왕국을 모두 정복하고 학살을 자행한 뒤, 13세의 진왕 정(政)은 스스로를 '황제(皇帝)'라 선포하고 '진시황제(秦始皇)' — 최초의 진 황제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배 영토 내에서 세습 제후의 권력을 종식시켰습니다. 전국을 군(郡)으로 나누고 다시 현(縣)으로 나누어, 군현의 장은 수도에서 임명하고 황제의 뜻에 따라 언제든 해임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옛 여섯 왕국에서는 거북등껍질, 조개껍데기, 옥 조각이 화폐로 쓰였지만, 진시황은 금과 구리 화폐로만 지불하라고 명했습니다. 국가의 생활은 통일된 규칙에 따라야 했습니다. 황제는 통일된 문자를 도입하고 도량형을 정비했으며, 수레 바퀴 간격을 동일하게 하고,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법률을 제정했으며, 모든 의기와 무기를 하나의 규격으로 만들도록 명령했습니다.

진시황은 엄격한 법 집행이 나라의 질서를 위한 최우선 조건이라 여겼습니다. 반역자는 처형되어야 했고, 가족은 그 구성원 각자의 행위에 대해 연대 책임을 졌습니다. 이를 통해 도적과 강도를 뿌리 뽑으려 한 것이지요.

진시황릉

진시황의 능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피라미드에 필적합니다. 리산(驪山)에서 72만 명이 37년에 걸쳐 이 능을 축조했습니다. 우선 산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세 개의 샘물까지 도달했습니다. 샘물은 다른 곳으로 돌려 보내고 구멍은 구리로 막았습니다. 구덩이 위에는 흙을 쌓아 올려 나무와 관목을 심었습니다. 무덤 바닥과 벽은 칠한 돌과 비취로 장식했습니다. 바닥에는 신성한 산의 모형과, 금·은 새가 떠다니는 수은으로 채운 바다와 강을 본떠 만든 형상들을 배치했고, 천장은 각종 별이 빛나는 하늘의 모습으로 꾸몄습니다. 진시황과 함께 수백 명의 처녀가 무덤에 묻혔는데, 그중에는 황제의 자매 1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한(漢)나라

초대 황제가 죽은 직후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권력 다툼의 승자는 향리의 촌장 출신 유방(劉邦)이었고, 그는 전한(前漢), 즉 서한(西漢)(기원전 206년~서기 25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한나라 초기 통치자들은 내분으로 파괴된 경제 회복에 주력해야 했습니다. 유천(劉徹) 황제(기원전 140~87년)가 즉위할 무렵에는 중앙 권력이 강화되고 생산 회복으로 국고가 차올랐습니다. 이제 국경을 넓힐 역량이 생긴 것이지요. 유천은 자신의 시호인 무제(武帝), 즉 '무인(武人) 황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나라에 막대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국고에 거두는 세금은 늘었고, 전쟁 탓에 관개 시설을 보수할 일손이 부족해졌습니다. 홍수와 가뭄이 잦아졌고, 피해는 마을과 도시를 모두 덮쳤습니다. 이미 무제 말년에 백성들은 무기를 들기 시작했고, 후계자 시대에는 수도에서마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23년에 살해된 왕망(王莽)에 대한 반발의 물결 속에서 유수(劉秀)가 부상했습니다. 25년에 그는 황제 자리에 올라 동한(東漢), 즉 후한(後漢)(25~220년)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동한'이라 불린 이유는 수도가 서쪽의 장안(長安)에서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동한 시대에는 천연가스를 연료로 쓰는 용광로에서 수력 풍구를 활용해 철을 제련하고 소금을 증발시켰습니다.

또한 나무껍질, 삼 헝겊, 넝마, 낡은 어구로 값싼 종이를 만드는 방법이 발견되었습니다. 새 왕조는 호전적이었습니다. 중국 조정에 공납을 바치기를 거부한 북베트남의 통치자와의 전쟁이 있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흉노와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국내에서도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동한 왕조에 결정타를 안긴 것은 184년 황건적(黃巾賊) 봉기(반군들이 머리에 두른 노란 천에서 이름이 유래)였습니다. 왕조의 멸망은 관료와 지주 간의 내분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동한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는 수도에서 끌려나가 군벌 동탁(董卓)과 조조(曹操)의 인질이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선례인 왕망처럼 임금을 배신했다 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배신자로 꼽힙니다.

동한 왕조의 몰락과 함께 통일 중국 국가는 세 개의 독립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낙양에 수도를 둔 위(魏), 건강(建康)에 수도를 둔 오(吳), 성도(成都)에 수도를 둔 촉(蜀)이 그것입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220년부터 280년까지 이어졌으며 내분과 혼란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263년 위나라 군대가 촉나라를 멸망시켰고, 280년에는 오나라를 정복했습니다. 265년부터 집권 왕조는 서진(西晉)이라 칭했습니다. 그러나 통일 10년 후 팔왕의 난이 일어났고, 이어 서쪽과 북쪽의 유목 민족들이 중앙평원 지역으로 침입했습니다.

316년 서진 왕조는 수도를 남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고, 318년 그 통치자는 폐위되며 건강(현대 난징)에 수도를 둔 동진(東晉)(317~420년)이 들어섰습니다. 420년에는 장군 유유(劉裕)가 왕위를 찬탈하여 송(宋)나라를 세우며 남조(南朝)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조의 중국 국가들과 대립한 것은 중국 북부에서 선비(鮮卑)족이 세운 국가들이었으며, 북위(北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왕조의 통치자들이 이끌었습니다.

한 왕조들의 내분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 언어·문자·풍습(특히 조상 숭배 풍습)의 통일성에 기반한 한족 공동체의 형성과 결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역사 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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