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니케아 포위전 – 제1차 십자군의 첫 승리와 비잔틴 제국과의 균열

니케아 포위전이란?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첫 번째 큰 성과는 바로 아나톨리아의 니케아 함락이었습니다. 니케아는 원래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호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셀주크 왕조의 지방 정권인 룸 셀주크 왕조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수도 니케아를 두고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이 함께 벌인 공성전을 '니케아 포위전'이라고 부릅니다. 이번 글에서는 니케아 포위전에 초점을 맞춰 당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서유럽의 상황

중세 유럽은 온난화와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서유럽만으로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황제가 뇌물 등을 받고 사제 임명권(서임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면서 로마 교회와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교회 측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사제 교육에 힘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봉건 사회 속에서 교육받은 사제가 교회에 들어오면, 정보 접근 수단이 없던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그 결과 열렬한 신앙심을 지닌 신자들이 대거 탄생했고, 이는 훗날 십자군 운동의 폭발적인 지지 기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비잔틴 제국의 구원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면서, 귀족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원정에 열광하게 됩니다.

십자군 원정이 실제로 결정되자, 준비를 마치던 귀족들보다 일반 민중들이 먼저 모여 출발했습니다. 전장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다수 포함된, 우합지중(烏合之衆)이라 불릴 만한 군대가 완성되었는데, 이를 민중 십자군(People's Crusade)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도 이들은 셀주크 왕조 앞에서 눈 깜짝할 새 궤멸적으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셀주크 왕조의 상황

셀주크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술탄 말리크샤 1세는 종교 정책의 실패로 내정이 어긋나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후계 분쟁으로 인한 내분과 지방 정권의 할거가 이어지며, 십자군을 연이어 막아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원래 셀주크 왕조의 통치 방식은 왕자들과 씨족의 유력 인사들을 각 지역에 파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나톨리아의 룸 셀주크 왕조를 비롯해 시리아, 이라크, 케르만, 호라산 등 술탄의 친척들이 연 지방 정권들이 각지에서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군이 원정을 떠나올 무렵에는, 지방 정권의 후계자가 어려 정치를 주도하지 못할 때 후견인 겸 섭정 역할을 맡는 아타베그(Atabeg)라는 직책을 통해 정치가 운영되었고, 아타베그가 만든 통치 체제도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룸 셀주크 왕조 동쪽 끝에 위치한 다니슈멘드 왕조(Danishmendids) 역시 아타베그가 세운 지방 정권 중 하나입니다.

문제는 이 두 셀주크계 정권, 즉 룸 셀주크 왕조와 다니슈멘드 왕조의 관계가 매우 험악했다는 점입니다.

이미 민중 십자군을 가볍게 격파한 경험 탓에 "십자군은 별것 없다"는 안일한 인식이 퍼져 있었고, 룸 셀주크 왕조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다니슈멘드 왕조와의 전투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약체화된 외적보다 내부의 적이 훨씬 더 시급했던 것이죠.

니케아 포위전의 작전은?

룸 셀주크 왕조가 다니슈멘드 왕조와의 전투에 몰두하는 사이, 십자군 본대가 셀주크 영토에 진입했습니다. 가장 먼저 니케아 성벽 아래 도착해 포위를 시작한 것은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of Bouillon)이 이끄는 본대였고, 이후 각지의 영주들이 잇달아 합류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주도한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도 참전했지만, 그는 보급 지원에 전념했습니다. 육상에 거점을 구축하고 니케아로 향하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니케아는 견고한 성벽과 200개에 달하는 탑을 자랑하는 요새 도시였습니다. 이에 십자군은 도시의 수원지를 차단하고 공격 부대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공략을 결정합니다.

십자군 본대 역시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본대는 대규모 조직의 지휘부 집단이었기에 사전에 알렉시오스 1세와 맺은 협력 관계 덕분에 물자를 문제없이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안정적인 보급이 가능했던 이유는 비잔틴 제국 영토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에몽 1세(Bohemond I)는 바다와 육로를 통해 식량을 운송하도록 준비하고 공성전을 개시했습니다. 주력 부대가 없는 룸 셀주크 왕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니케아는 동쪽에서 전투 중이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수도가 중무장한 대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킬리지 아르슬란은 급히 회군했지만, 십자군은 너무나 강력했습니다. 결국 그는 수도 탈환을 포기하고 후퇴를 결심했으며, 이 시점에서 니케아에 항복을 권하기까지 합니다.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 사이의 균열

킬리지 아르슬란이 후퇴를 고민하고 "이제 함락될 시간"이라는 분위기가 감돌 무렵,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니케아의 지도자와 은밀히 접촉해 항복을 종용합니다.

원래 자기 나라의 백성이었던 만큼, 십자군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면 훗날 약탈 등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니케아가 술탄에게 항복을 권하는 일까지 진행했고, 결국 니케아는 항복합니다. 그런데 이 항복 소식에 귀를 의심한 쪽은 바로 십자군이었습니다.

니케아는 주력으로 싸운 십자군이 아닌 비잔틴 제국에 항복한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과의 접촉을 통해 항복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비잔틴 제국 측도 십자군과의 관계를 고려해 배후 거래가 드러나지 않도록 보병을 파견하고, "전투 끝에 항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한 위장 작업까지 벌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명백히 부자연스러웠고, 그 결과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1세에게 분노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더욱이 십자군은 원정 초창기부터 약탈로 생계를 유지해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적국에 들어가 점령과 약탈을 통해 물자와 식량을 확보하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에게 포상으로 자금과 군마를 지급했지만, 직접 점령과 약탈을 했다면 전과가 더 좋았을 것이라 여긴 이들에게는 오히려 반감만 커졌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과 비잔틴 제국 사이의 불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서 교회 통합의 좌절을 가로막은 요인 중 하나인 제4차 십자군 원정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복선이 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흐름을 잇는 '안티오키아 포위전'을 다룰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