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서유럽에서 교회는 봉건 사회가 성립하면서 막대한 기부를 받으며 권위를 키워갔고, 나아가 황제에게 굴복을 요구할 만큼 강력한 정치적 힘을 행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글에서는 교회가 십자군 원정이라는 과감한 결정에 이르기까지의 배경, 황제와 국왕들이 이에 동의한 이유, 원정이 남긴 영향, 그리고 이후 유럽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권과 주변 지역의 상황
유럽은 대체로 유라시아 대륙 북서부의 반도 지역을 가리킵니다. 동남쪽으로는 그리스 너머에 중동이, 남쪽에는 아프리카 대륙이 자리하고 있어,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유럽의 역사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구분 참고: 녹색=유럽, 보라색=중앙아시아, 분홍색=소아시아(아나톨리아), 적자색=중동, 하늘색=북아프리카. 이집트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양쪽 분류에 포함되며, 소아시아도 중동 분류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주변국과 서유럽 각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주변국의 상황
십자군 원정이 시작될 무렵,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일부는 이슬람 왕조인 셀주크 왕조의 세력 아래 들어가 있었고, 셀주크 왕조는 기독교·이슬람·유대교 세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방면으로도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였고, 1세기경부터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7세기 초부터는 이슬람 왕조의 손에 넘어가면서 여러 종교의 성지가 된 땅입니다.
파티마 왕조 시대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무슬림과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 대기근으로 파티마 왕조가 약화되자 셀주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이후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독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북아프리카 서부의 무라비트 왕조(알모라비드 왕조)가 북상하여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했습니다. 기독교 세력이 되찾았던 이베리아반도 남부가 다시 이슬람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도 비슷한 시기의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국가 입장에서는 "우리 나라도 언젠가 이슬람 왕조의 나라에게 잠식당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중동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럽의 이러한 위기 의식도 근거 없는 불안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서유럽의 상황
봉건 사회가 성립하면서 교회는 기부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고, 그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때로는 황제를 굴복시킬 만큼의 힘을 갖추게 된 시기가 바로 11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였습니다.
동시에 유럽인들의 종교적 열정도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교회가 농촌 사회에서 유일한 정보 전달 기관이었다는 점도 한몫했습니다(중세 서유럽의 봉건 사회 성립과 교회의 권위 참조). 이러한 종교적 열정과 맞물려, 기독교와 이슬람 양측의 성지인 팔레스티아·시리아의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에 독점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더해 유럽에서는 삼포식 농법(봄 파종·가을 파종·휴경지의 순환)과 철기 생산의 보급 등 농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생산력 증가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기존의 토지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났고, 영토 확장에 대한 욕구도 커져갔습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시점이었습니다.
- 비잔틴 제국이 서유럽 세계에 구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 서유럽 교회의 발언력이 정점에 달해 여론이 십자군 편에 서 있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서방 교회)의 수장인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 II)는 동서 교회가 분열된 상태에서 통합 협상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교회를 통합하고 싶다", "통합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싶다"는 의도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르바노 2세는 구원 요청을 계기로 클레르몽 종교회의를 열고,
- 이슬람 세력 격퇴
- 예루살렘 탈환
을 목표로 하는 십자군 원정을 결정했습니다. 이로부터 7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전개
십자군 원정은 1096년, 교황의 요청에 따라 각국의 제후와 기사들을 모집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참가자들에게는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라는 달콤한 말이 동기 부여로 제시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살육에 시달려야 했던 기사 계급에게 이 말은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죄를 반복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
는 해석으로 이어졌고, 십자군은 신의 인정을 받은 듯한 착각 속에 약탈과 학살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진격했습니다.
한편, 사정상 참전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부하면 참전하지 못해도 죄를 용서받는다"
라며 병역을 대신하는 죄 사면의 방법이 제시되었습니다. 이것이 원정 자금의 재원이 되었고, 훗날 면죄부(indulgence)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습니다.
실제로 십자군은 이교도에 대한 박해와 학살, 약탈을 자행했습니다("십자군 잔혹성", "십자군 학살" 같은 키워드가 인터넷에 널려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것은 제4차 십자군이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임에도 재정난에 시달리던 제4차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권인 헝가리의 항구 도시 자라(자다르)를 함락했고, 군자금을 대신 베네치아 상인들과 손을 잡으면서 비잔틴 제국 침공이라는 폭주를 감행하게 됩니다. 같은 기독교 국가 침공에 반대하며 이탈하는 사람도 있었고, 교황은 비잔틴 제국 침공 소식에 분노했지만, 본래의 염원이 "동서 교회의 통합"이었던 만큼 결국 교황도 비잔틴 공격을 묵인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4차 십자군은 기독교 동서 대립을 결정적으로 만든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동서 기독교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한 균열은 "교리 해석의 차이" 외에 "제4차 십자군의 분쟁 때문"이라고 회자됩니다.
이 사건 이후 이슬람 세력과의 완충 지대 역할을 하던 비잔틴 제국의 국력은 쇠퇴했고, 오스만 제국이 소아시아로 진출하는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평가됩니다.
한편, 십자군이 이처럼 전혀 다른 지역을 침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원군이 오지 않자 예루살렘 탈환을 포기하고 "이슬람 세력의 근거지인 이집트"를 겨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제5차 십자군 이후에는 참가자들 간의 사정이 복잡해지면서 내분 ⇒ 탈환 실패라는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대규모 원정인 제7차 십자군 이후 십자군 원정은 더 이상 대규모로 열리지 않았습니다. 20년 후 마지막 거점마저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기며 십자군 국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남긴 영향은?
- 십자군 원정을 최초로 제안한 교황의 권위는 오히려 실추
- 십자군을 지휘한 각국 국왕의 권위는 상승
- 십자군의 이동으로 도시가 번성 → 무기류 등의 거래로 상업이 활발해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원정이다!"라고 외쳤던 교황의 권위가 오히려 떨어진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정치 세력으로서의 교회의 힘과 발언권이 과거에 비해 확실히 약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 결과 상업이 발달하고 봉건 사회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유럽 각국으로 이어지는 각 나라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왕권이 강화되었고, 독일에서는 영주들의 세력이 강해지며 분권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주교 세력을 누르고 자치 도시(코무네)로 발전하여, 주변 도시들과 연합해 일종의 도시 국가처럼 독립해 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