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북서항로를 찾아서: 프랭클린 원정대의 비극

북서항로를 찾아서: 프랭클린 원정대의 비극

북극해의 HMS 에레버스호와 HMS 테러호, 제임스 윌슨 카마이클 그림. 1847년. 국립해양박물관(런던 그리니치) • 위키미디어 커먼즈

판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선박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오갈 수 있는 길은 마젤란이 1520~1521년에 개척한 항로를 따라 아메리카 대륙 남단을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길고 값비싼 이 항해는 많은 항해사들로 하여금 더 직접적인 경로를 찾게 만들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북서항로', 즉 아메리카 대륙 북쪽을 관통하는 바다길이었다.

그러나 초기 원정들은 이 사업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빠르게 증명했다. 꿈의 지름길 대신 사람들은 약 1,500킬로미터에 달하는 섬과 해협, 만 사이를 파고들어야 했다. 게다가 혹한의 위협 때문에 항해 가능 기간은 여름 2~3개월로 제한되었다. 조류에 따라 움직이는 빙하가 통행로를 막거나 목조 선박을 들이받아 못 쓰게 만들고, 심지어 부숴버릴 수도 있었다.

수많은 시도, 수많은 실패

이러한 이유로 북서항로 찾기는 4세기 동안 실패가 예정된, 때로는 참담한 결과로 끝나는 시도들의 연속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장악한 항로 외에 인도로 가는 새로운 루트를 찾고자 했던 잉글랜드가 이 탐사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헨리 7세의 위탁을 받은 이탈리아인 조반니 카보토(장 카보)가 1496년에 시도한 이후,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수많은 잉글랜드 탐험가들이 캐나다 북동부로 향했다. 1576년 마틴 프로비셔, 1585년 존 데이비스, 1610년 헨리 허드슨이 그들이다. 특히 로버트 바일롯과 윌리엄 배핀이 1616년에 이룬 원정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이 랭커스터 해협을 발견했지만, 실제로 그곳이 북서항로의 입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랜 공백 이후 탐사는 19세기 초에 재개되었다. 캐나다가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기에 존 배로우가 이끄는 영국 해군성은 1816년부터 탐사를 다시 추진했다. 1818년 그린란드 동해안을 항해한 존 로스는 배핀섬을 재발견하고 자신이 만이라 여겼던 랭커스터 해협 앞을 지나쳤다. 다음 해, 로스의 부관 윌리엄 패리는 그 지역으로 되돌아와 해협을 따라 750킬로미터를 항해해 멜빌섬에서 겨울을 나기도 했다. 그가 계속 전진했다면 보포르해를 거쳐 알래스카 해안에 닿았을 것이다.

천명의 사나이

이후 항해사들과 탐험가들은 캐나다 북동부와 미국 북서부 해안을 지도에 옮겼지만, 두 끝점을 잇는 직접적인 해상 항로만은 여전히 없었다. 1845년 해군성은 드디어 북서항로를 정복할 대원정을 조직하려 했다. 원정 지휘는 패리와 로스에게 제안되었으나 두 사람 모두 거절했고, 세 번째 후보로 이름이 오른 이가 제독 존 프랭클린 경이었다.

프랭클린은 이미 캐나다 북극 탐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1819년 허드슨만에서 코퍼마인강까지 육로 원정을 이끌었지만 참담하게 끝났다. 20명의 부하 중 11명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생존을 위해 부츠 가죽을 먹어야 할 정도였다. 1825년에는 서쪽으로 더 나아간 또 다른 육로 원정을 무사히 마쳤지만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1836년 인생의 전환을 꾀했던 프랭클린은 태즈메이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1843년, 식민지청이 잘못된 행정을 이유로 사임을 강요할 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60세의 고령이었음에도 해군성은 그를 신뢰하고 대원정의 지휘권을 맡겼다.

1845년 HMS 에레버스호와 HMS 테러호가 런던을 출발해 북상할 때 당국은 이번이 결정적인 원정이라 확신했다. 두 척의 선박은 철재 보강 선체와 방수 격벽을 갖춘 튼튼한 3돛대 범선으로, 그 성능은 남극에서 이미 검증된 바 있었다. 미국 동해안에서 출발해 베링 해협을 통과하는 항해는 1년을 넘기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만일에 대비해 3년분의 통조림 식량이 실렸다. 두 척에 분산 탑승한 129명의 승무원을 위해 각 선박에 1,200권 규모의 도서관을 설치할 계획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중 단 한 명도 산 채로 돌아오지 못했다.

극북에서 실종되다

프랭클린의 두 선박은 1845년 7월 랭커스터 해협에 진입했다. 포경선이 그들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얼음 장벽에 막힌 해협 출구에서 승무원들은 데번섬 맞은편의 작은 비치섬에서 월동하며 임시 야영지를 세웠다. 1850년 구조 원정대는 이 근소한 피난처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600개가 넘는 빈 통조림 캔과 함께 원정대원 3명의 무덤을 찾아냈다. 1984년에는 법의학 팀이 선원들의 미라화된 유해를 연구하여 높은 납 농도를 확인했는데, 이는 접합이 불량한 통조림 캔의 내용물 섭취로 인한 중독이 사인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다음 해 여름인 1846년, 두 선박은 웨일스 왕자섬과 서머셋섬 사이의 해협을 따라 남하를 재개했다. 그러나 9월 킹윌리엄섬 근처에서 다시 얼음에 갇혀 임시 야영지에서 두 번째 극지 겨울을 보내야 했다. 15명의 선원과 9명의 장교가 현장에서 사망했고, 1847년 6월 11일 프랭클린 본인도 세상을 떠났다. 이는 1859년 조직된 또 다른 원정에서 발견된 두 건의 문서로 확인된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프랭클린이 식량이 아직 남아 있을 때 킹윌리엄섬을 떠나 남쪽으로 향하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그렇게 했다면 캐나다 본토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크로지어 선장이 이끄는 생존자들은 1848년 4월 말 출발했다. 걸어서, 그리고 침몰을 면한 구명보트 하나를 끌며 그들은 그레이트피시강 하구에서 대륙에 닿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도달하지 못했다. 여정 도중 저온과 굶주림, 그리고 괴혈병과 납 중독 같은 질병 때문에 그들은 차례차례 사망했다.

불행한 최후

1854년, 허드슨만 회사 소속 의사 존 레이는 몇몇 이누이트를 만났고, 그들은 흰 사람 40명 무리가 배를 끌고 그레이트피시강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주었다. 같은 해 레이는 크로지어 선장을 포함한 프랭클린 일행의 유해를 발견했고, 몇몇 이들이 식인에 이를 정도로 처참한 운명에 처했음을 짐작했다. 여러 솥에 담긴 내용물이 그 끔찍한 증거였다.

한편 여러 구조 원정대가 프랭클린과 그의 선원들을 산 채로 찾기를 바라며 출발했다. 프랭클린의 아내는 몇 년간 굴하지 않고 노력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항해들은 복잡한 북서항로의 지리를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마침내 노르웨이인 로알 아문센이 요아(Gjøa)호를 이끌고 1903년부터 1906년까지 3년에 걸친 감행적인 원정 끝에 동에서 서로 향하는 최초의 횡단을 이루어냈다.

더 읽을거리
북서항로(The Northwest Passage), N. & J.-C. 포레스티에-블라자르, Naef, 2011.

드디어 발견된 프랭클린의 배

프랭클린의 흔적을 찾는 긴 탐색은 2014년 9월, 원정 선박 두 척 중 하나인 HMS 에레버스호의 발견으로 일단락되었다. 2008년 이래 이누이트들이 불쌍한 항해사들을 목격했다고 주장한 지역, 즉 킹윌리엄섬 방면에서 여섯 차례의 탐사 작전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소나를 장착한 수중 드론이 난파선을 찾아냈다. 배에서는 6파운드 함포 2문, 등잔, 청동 빌지 펌프, 그리고 출항 직전에 설치된 1845년식 선종(船鐘)이 발견되었다.

누가 항로를 발견했는가?

북서항로 발견의 영예를 두고 두 후보가 경쟁한다. 한 명은 로버트 매클루어다. 1850년 프랭클린을 찾던 중 그는 패리가 30년 전에 탐사했던 뱅크스섬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얼음에 갇힌 그는 3년 동안 갇혀 있다가 겨우 구조되었다. 반면 아문센은 1903년부터 1906년 사이 해협을 통과하는 항해에 최초로 성공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