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의 배경
프랑스는 오랫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왕국에 대한 야망을 품어 왔습니다. 밀라노 공작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외손자였던 루이 12세는 이러한 혈통을 근거로 1499년 밀라노 공국을, 1501년에는 나폴리를 합병했습니다. 그러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 국왕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1511년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잉글랜드·베네치아로 구성된 '신성 동맹'을 결성해 루이 12세를 이탈리아 영토에서 축출하려 했습니다.
루이 12세가 사망하자, 20세의 젊은 군주가 프랑스 왕위에 오른 것을 동맹 진영은 반색하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 국왕이 장인(岳父)인 선왕과 똑같은 야망을 품고 있음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날짜: 1515년 9월 13일~14일
장소: 포 평원의 마리냥(현 이탈리아 메레냐노)

주요 인물
- 프랑수아 1세 (프랑스 국왕)
- 알랑송 공작 샤를 4세
- 바르톨로메오 다비아노 (베네치아군 사령관)
- 아르마냐크 총독 자크 드 주누약
- 피에르 드 테라유, 바야르 영주 — '기사 바야르'로 불림
- 부르봉 공작 샤를 3세
- 막시밀리안 1세 폰 합스부르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
- 라 팔리스 후작 자크 드 샤반느
- 교황 레오 10세
- 시온 추기경 마티외 시너
- 막시밀리아노 스포르차 (밀라노 공작)
전투 경과
젊은 프랑수아 1세는 대담하게도 알프스 산맥을 아르장티에르 고개를 통해 넘었습니다. 대포가 통과할 수 없는 이 험로는 화약과 폭발물의 힘으로 개척되었는데, 이는 당대 군사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행보였습니다. 프랑스 국왕의 갑작스러운 이탈리아 도착은 밀라노 공작 막시밀리아노 스포르차와 그의 동맹 세력들—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제국에 고용된 용병인 스위스 연방군, 스위스를 지원하던 시온 추기경, 그리고 교황 레오 10세—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전투 없이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스위스 창병들에게 거액을 지급하고 물러나도록 유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9월 13일 아침, 동맹군 병사들이 프랑스군에게 돌진하며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3만~4만 명으로, 바야르 기사, 라 팔리스, 아르마냐크 총독,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아유, 부르봉 공작 샤를 3세, 알랑송 공작 등 당대 최고의 장수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들 중 절반은 최고가를 제시하는 측에 고용되는 독일 출신 용병, 이른바 '란스케네트'였습니다. 상대는 무적이라 일컬어지던 2만 명의 스위스군이었습니다.
첫날의 전투는 극심한 혼란 속에 끝났지만, 둘째 날에는 베네치아군 사령관 바르톨로메오 다비아노가 이끄는 베네치아군이 프랑스를 지원하면서 전세가 젊은 군주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틀간 포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했고, 이러한 화력의 기습은 연방군에 8,000명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안겼습니다. 이 전투는 프랑수아 1세 생애 첫 번째 승리로 기록됩니다.
전투의 결과와 역사적 의미
마리냥의 승리는 1516년 볼로냐 협약의 체결로 이어졌습니다. 이 협약은 프랑수아 1세를 '교회의 장자'로 선포하고, 특히 프랑스 영토 내 성직자 임명 권한에 관한 프랑스 왕권의 우위를 로마가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프랑스는 프리부르 영구 평화 조약(1516)을 통해 스위스로부터 밀라노 공국 포기와 더불어 다시는 프랑스와 충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아울러 마리냥 전투는 포병의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운용 덕분에 새로운 군사 전략의 시대를 열었으며, 전쟁의 양상을 근대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프랑수아 1세에게 첫 번째 결정적 승리이자 영광의 후광을 안겨주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프랑수아 1세는 저명한 기사 바야르로부터 마리냥에서 직접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이는 훗날 만들어진 일화로, 십 년 후인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참패한 사실을 감추기 위한 미화로 보입니다.
어쨌든 마리냥 전투는 프랑스에게 국제 정치무대에서의 정치적 중요성을 확립해 주었으며, 특히 롬바르디아 지역에 대한 프랑스 국왕의 지배 정당성을 확인시켜 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