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이라크 전쟁: 미국의 단독 개입과 중동의 재앙

전쟁의 배경

9·11 테러 이후 약 18개월이 지난 시점,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발이 묶여 있던 미국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이 분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이라크를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가 테러리즘을 지원한다고 확신했지만, 테러 조직과의 연루를 입증하지 못하자 CIA와 함께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국제연합(UN)에 제시하는 국가 차원의 기만극을 벌였습니다.

대다수 국가들은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인도주의적 명분보다는 사담 후세인에 대한 복수심과 경제적 이익 추구가 진짜 동기라는 비판이 거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영국과 함께 단독으로 전쟁에 돌입했고, 이 선택은 이라크뿐 아니라 미국 자신에게도 참사가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2003년 3월 19일 ~ 2011년 12월 18일

주요 인물

  •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전쟁의 경과

2002년부터 국제사회의 압도적 다수는 전쟁 개시에 반대했고, 유일하게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영국만이 미국을 지지했습니다.

2003년 3월 19일 미국은 이라크에 정식 선전포고를 했고, 후세인 정권은 같은 해 4월 초 붕괴했습니다. 미군은 바그다드에서 해방자로 환영받아 서구식 민주주의 모델을 정착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군대는 실책을 거듭하며 순식간에 현지 주민들의 적대감을 샀습니다.

2003년 12월 13일, 지역 최후의 세속 지도자였던 사담 후세인이 검거되었고, 그는 2006년 12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2004년 3월 8일 잠정 신헌법이 통과되었지만 수많은 논쟁을 일으키며 갈등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남부 시아파는 게릴라전을 펼치며 바그다드 장악에 나섰고, 이에 맞선 수니파도 무장에 가세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북동부의 쿠르드족은 혼란을 틈타 자치 지역을 수립했고, 이는 튀르키예 쿠르드족의 독립 요구를 되살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알카에다의 이라크 지부인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ISIL, 다에시)은 실패한 국가의 분열을 배경으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나라의 석유 자원은 각 파벌의 전쟁 자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2000년대 말에 이르자 이라크은 파탄 상태에 빠졌고, 열악한 위생 환경과 불안정성은 시리아, 리비아를 거쳐 중동 전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미국은 치명적인 게릴라전에 시달리고 내분으로 찢어지며,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제2의 전선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고문 스캔들까지 겹치면서 이 전쟁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제2의 베트남'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2008년 11월 17일 '외국군 철수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미국은 2011년에 이를 이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은 파탄하고 분열된 나라, 즉 심각한 인도주의적 재난 한복판에 놓인 이라크였습니다.

전쟁의 결과

  • 이라크 전쟁으로 미군 4,500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라크에서는 10만~30만 명(대부분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여러 면에서 부당했던 이 전쟁은 중동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이슬람 테러리즘에 연료를 더했습니다.
  • ISIL의 성장은 중동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리비아와 시리아 내전으로 이어지는 직접적·간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4년에는 모술을 점령해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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