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809년 할버슈타트 전투: '검은 군단' 대 베스트팔렌군… '승리 아니면 죽음'의 함성

1809년 할버슈타트 전투:  검은 군단  대 베스트팔렌군…  승리 아니면 죽음 의 함성

복수를 꿈꾸던 '검은 공작'

1809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나폴레옹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군의 추격을 피해 망명 생활을 이어가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역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빈 정부와 협의하여 옛 신민들과 독일 각지의 지원병들로 구성된 보병·기병·포병 혼성부대 창설을 결정했다.

공작은 부대원들에게 검은 제복을 입히기로 했다. 모자에는 해골과 교차된 두 개의 뼈 문장이 새겨졌다. 이 '상복' 같은 검은 옷은 고향이 적의 점령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검은 군단(Black Corps)'은 오스트리아군에 합류해 싸웠다.

동맹의 배신, 고립된 군단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휴전이 체결되면서 공작과 그의 부하는 적진 한가운데서 아무런 지원도, 희망도 없이 완전히 홀로 남겨지고 말았다. 1809년 7월 26일, 공작은 베스트팔렌으로 진격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그의 군세는 소규모 3개 대대로 구성된 보병 1,150명, 후사르 연대와 창기병 중대로 이루어진 기병 630명, 그리고 포 4문과 포병 80명이었다.

같은 시기,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그가 임명한 베스트팔렌 국왕 제롬 보나파르트는 장군들에게 '검은 군단'을 분쇄하라고 명령했다.

할버슈타트 성벽 앞에

한편 베스트팔렌 제5보병연대는 '검은 군단'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시 할버슈타트에 진지를 구축했다. 1809년 7월 29일 아침, 성벽 도시 앞에 '검은 군단'의 선봉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5연대를 지휘하던 프랑스인 대령 마리오네는 일부 중대에 출격 명령을 내려 이를 격퇴하려 했다. 그러나 '검은 포병'의 단 몇 발의 포격만으로 하얀 제복의 베스트팔렌 병사들은 도망쳐 버렸다.

제5보병연대는 약 2,000명으로 '검은 군단'과 비슷한 규모였다. 여기에 도시 방어 시설까지 더해졌고, 약 1개 대대 규모의 시민방위대도 지휘 아래 두고 있었다. 반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할 수 없었던 공작은 순찰대로 외곽을 통제하게 한 뒤, 마침내 기습 강행을 결심했다.

'승리 아니면 죽음'

공작은 두 개의 돌격 종대를 편성했다. 첫 번째는 그가 직접 지휘하며 하르슬레버 문(Harsleber Gate)을 공략하고, 두 번째는 쿨링거 문(Cullinger Gate)을 노리는 것이었다. 공격은 기세 좋게 시작됐다. 특히 쿨링거 문에서의 전투는 치열했고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마침내 브라운슈바이크 포병의 정확한 일격이 성문을 파괴했다. 즉시 '검은 엽병'들이 도시 안으로 돌진했다. 적의 사격을 무릅쓰고 적들이 임시 방어책으로 세워둔 긴 수레들을 끌어 치운 뒤, '검은 병사'들은 '승리 아니면 죽음(Victory or death)'이라는 전투 함성을 지르며 좁은 골목을 누비며 질주했다.

하르슬레버 문에서의 전투도 특히 처참했다. 결국 폰 헤르텔 중위와 그의 부하들의 영웅적 활약으로 문이 함락되었고, 제2대대의 두 개 중대가 시내로 진입했다. 쿨링거 문으로는 '검은' 기병대도 돌입해 좁은 거리를 따라 빠르게 진격했고, 마침내 중앙 광장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수백 명의 적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지휘관이 예비대로 붙잡아 두고 있던 병력이었다.

어둠이 만든 승리

'검은' 기병들에게 다행인 것은 이미 해가 어두워졌다는 점이었다. 적들은 자신들이 우세한 병력과 마주했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베스트팔렌군이 최소 2:1로 수적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기병들은 냉정하게 항복을 요구했고, 베스트팔렌 병사들은 그저 무기를 내려놓았다.

소규모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전투는 곧 멎었다. 브라이트 문 근처 건물에 몸을 숨긴 몇몇 베스트팔렌 병사들이 밤새 저항했으나, 다음 날 아침 그들 역시 항복했다.

이것은 '검은 군단'의 위대한 승리였다. 군단은 4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적에게 600명의 손실을 안겼고, 장교 80명과 부사관 및 병사 약 2,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5보병연대의 군기도 탈환했다. 동시에 300명의 베스트팔렌 포로가 '검은 군단'에 가담해 거의 상쇄되었던 손실을 메웠다.

1809년 할버슈타트 전투:  검은 군단  대 베스트팔렌군…  승리 아니면 죽음 의 함성

'검은 공작'은 부하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