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흐름 속 아프가니스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이른바 '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갈등은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즉 20세기 후반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다만 냉전의 강도가 늘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1947년부터 1962년까지는 극심한 긴장이 이어졌고, 이후 1962년부터 1977년까지는 동서 관계가 완만해진 '데탕트(긴장 완화)' 시기가 펼쳐졌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1950년대부터 소련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여기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숙적인 파키스탄이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배경도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1973년 7월 쿠데타로 국왕이 축출되면서 새로 선포된 공화국은 소련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 4월에는 또 한 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 정부는 곧 종교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수상 암살 사건이 일어나는 등 결국 본격적인 내전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1979년 12월 24일, 소련군의 진입

주요 인물: 지미 카터(미국 대통령),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훗날의 소련 서기장)
1979년 12월 24일,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했습니다. 붉은 군대는 전차와 공수부대를 동원해 카불에 들어가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개입을 강행했고, 친소 성향의 공산주의자 바브라크 카르말을 권좌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저항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 정권과 소련에 적대적인 이슬람 무장 세력, 즉 무자헤딘은 경무장 부대가 벌이는 기습·교란 작전 중심의 게릴라전으로 맞섰습니다. 소련군은 혹독한 기후와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한 이동의 어려움에 시달렸고, 이러한 비정규전에 훈련되어 있지 못해 상당한 고전을 겪었습니다.
유엔은 신속하게 소련의 개입을 규탄했지만 점령은 장기화되었습니다. 한편 국제사회의 개입도 이루어졌는데,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경유해 무자헤딘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결과와 영향
-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약 2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으며, 분쟁은 1988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88년 4월 14일 소련·미국·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4개국이 제네바 협정에 서명했고, 막대한 손실을 한탄한 고르바초프는 같은 해 소련군을 철수시켰습니다.
-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동서 관계를 크게 뒤흔들며 데탕트 시대의 종말을 알렸습니다. 이번 개입의 목적은 명확하지 않으나, 모스크바가 이슬람주의의 확산을 경계해 자국을 보호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데탕트의 종식은 미국의 대소련 경제 제재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한 서구 다수 국가의 보이콧으로도 드러났습니다.
- 소련군이 철수한 뒤에도 내전은 계속 이어졌으며, 아프가니스탄이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실시한 것은 2004년에야 가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