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과 역사 사이, 로마를 다스린 일곱 왕
로마의 전승은 전설과 역사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로마 공화국이 건국되기 전까지 무려 일곱 명의 왕이 차례로 로마를 다스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사비니족(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에 최초로 정착한 민족), 라틴족, 에트루리아인이었습니다. 로마의 초대 창건자 로물루스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이야기처럼 이 시기는 전설에 휩싸여 있지만, 왕들은 훗날 세계를 제패할 도시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약속의 땅 로마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에트루리아(에트루리아인의 땅)의 타르퀴니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노(老) 타르퀸 역시 로마로 이주해 정착한 인물입니다. 어느 날 왕권의 상징인 독수리가 날아와 남편의 모자를 물어 올렸다가 다시 씌워주는 것을 본 그의 아내 타나킬은 이를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선왕 안쿠스의 아들들을 계승 순위에서 배제하는 강력한 선거운동을 벌여 왕위에 올랐고, 이로써 에트루리아인의 통치 시대가 열렸습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등 수많은 건축물의 축조가 전해지는 노(老) 타르퀸이 암살되자, 그의 사위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뒤를 이어 정복 사업을 계속하며 로마를 한층 더 넓히고 도시의 제도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민을 재산에 따라 조사·분류함으로써 훗날 로마 조세 제도의 원형을 마련했고, 로마를 4개의 트리부스(부족)로 나누어 도시 행정 체계를 정립했습니다. 최초의 로마 화폐를 만든 인물이 바로 그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위이자 노(老) 타르퀸의 아들인 '오만한 타르퀸'에게 암살당했고, 로마에는 참주(僭主)의 폭정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만한 타르퀸'이라는 이름은 곧 '교만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광대한 영토를 병합하고 카피톨리움 언덕 위에 미네르바·유노·유피테르 신전과 같은 수많은 기념물을 세웠지만, 그의 권력은 오직 폭력으로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509년

주요 인물
- 노(老) 타르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 오만한 타르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
-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왕정 몰락의 과정
전설에 따르면 왕 '오만한 타르퀸'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루크레티아라는 젊은 여인을 겁탈했고, 루크레티아는 복수를 간절히 요구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루크레티아의 남편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은 타르퀸 가문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기원전 509년 왕정을 전복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통치 형태인 공화정(共和政)이 탄생했습니다.
공화정은 과두정적인 체제였습니다. 지배 계급인 파트리키(귀족)는 평민(플레브스)에게 고위 관직의 문을 거의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평민은 '명예로운 경력(cursus honorum)'이라 불리는 관직 등용 사다리에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리들은 코미티아(민회)를 통해 선출되었으며, 종신직으로 임명된 전직 관리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법률을 심의했습니다. 원로원의 의견, 즉 senatus consultum(원로원 의결)은 현직 관리들의 결정보다 더 큰 권위를 지녔습니다. 관리 가운데 두 사람은 집정관으로 임명되어 1년간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로마 공화국의 유명한 좌우명이 보여주듯, 국가는 '원로원과 로마 인민(Senatus Populusque Romanus)', 즉 SPQR였고, 그 약자는 기념물과 화폐에 새겨졌습니다.
결과와 영향
왕정의 폐지와 함께 두 명의 집정관이 권력을 분담하는 이두(二頭) 체제의 공화국이 성립하면서, 로마는 이 제도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공화국은 약 5개 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지중해 전역에 걸친 패권을 확립하며 로마가 세계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